두시부터 다섯시간, 열번째 편지
안녕하세요
어느덧 열 번째 편지를 쓰고 있네요. 총 61번의 출근 중에 오늘은 13번째가 되겠습니다. 대충 이런 짓을 5번이나 더 반복하면 제게도 끝이 오겠네요.
어제는 부모님과 오랜만에 긴 저녁식사를 함께 했습니다. 원래 식사를 마치고 항상 할 일이 있거나, 급히 쉬고 싶어서 2층으로 부리나케 달려 나갔는데, 어제는 오래간만에 엉덩이를 길게 붙이고 있었습니다. 유럽에 다녀온 이후로 제 여행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깊게 나눈 적이 없었거든요.
사실 그보다도, 집에 돌아가는 길에 전날 밤 옥상에서 피우고 냄새를 없애기 위해 창가에 말려놓은 꽁초가 번뜩 생각이 났습니다. 엄마가 가끔 냉장고를 쓰러 제가 지내는 2층으로 올라오는데, 운이 나빴다면 엄마가 오늘 내 꽁초를 봤겠구나 싶은 느낌이 정확히 집 앞 오십 미터에서 번뜩 느껴지더라고요. 마음이 계속 불편했습니다. 그래서 저녁을 먹던 중에 유럽 다녀온 이야기를 하다가, 흡연 고백을 했어요. 물론 한 달에 한 갑 정도만 태우는 정도의 미약한 흡연자라는 것도 엄청 강조하였죠. 반응은 그렇게 거세지 않았어요. 사실 이전에도 한번 들킨 적이 있었거든요. 그땐 저의 것이 아니라 친구 것을 맡아준 것이라 했는데, (물론 반은 진실입니다. 공동 구매했어요) 이번엔 누가 봐도 저의 꽁초였어서. 그냥 이실직고가 낫겠다 싶어 정면돌파를 했죠. 다행인 건지 덤덤하게 인정을 받았습니다. 인정이라 하니 웃기지만, 뭐 아무튼 별소리 안 들었다는 거예요. 아버지만 조금 어이없어하셨죠. 왜냐면 제가 그간 아버지의 흡연을 가지고 잔소리를 엄청 해댔으니까요. 본인은 이제 전자담배로 갈아탔다면서 으쓱하시길래 어머니가 옆에서 “그럼 애한테 전담 사줄 거냐고” 드립을 치셔서 조금은 유쾌했네요. 뭐 아무튼 그럼에도 달라질 건 없어요. 대놓고 피기엔 전 죄책감을 잔뜩 지닌 사람이고, 자녀로서의 도리는 아니잖아요. 제 마음만 조금 가벼워졌을 뿐이죠.
저는 꾸준히 새벽녘에 도둑고양이처럼 옥상으로 향하겠죠. 몰래 한숨을 지피러요.
그래도 예상치 못한 자백에 저도 마음이 불편했어요. 그리고 왜 이렇게 꼬리가 길었나 자책했죠. 제 예상대로 어머니는 꽁초를 발견하신 게 맞았어요. 분명 창문을 늘 열어놓는 저인데, 돌아와 보니 굳게 문이 닫혀있더라고요. 아무튼 솔직하게 임했으니, 그거면 됐어요. 부모님도 오히려 솔직하게 나오니 그게 낫다고 하시더라고요. 저희 집 50대 두 분은 항상 ‘쿨한’ ‘요즘’ 부모가 되고 싶어 하시기에 이 모든 게 가능했답니다.
모쪼록. 케첩 고백의 하루였네요 어제는.
“학생이니?” “……” “때를 기다리고 있어요”
최근에 본 ‘성적표의 김민영’이라는 영화에 나온 한 장면입니다. 대학 진학을 택하지 않은 삶을 사는 정희에게 떡볶이집 아주머니가 던진 질문과 그 대답이에요. 때를 기다린다라.. 이보다 적절한 말이 있을까요. 저도 지금 때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사실 정확히 제가 무얼 기다리고 있는진 모르겠는데. 다만 아직은 때가 아니라는 거죠. 아직 제대로 된 취준을 하기엔 졸업도 한참 남았고, 이것저것 아직은 많이 어설픕니다. 오늘 꾼 꿈에서 전 오랜만에 발표를 했습니다. 왜인진 모르겠는데 큰 소리로 앞에 나가 자기소개, 자기 PR을 하고 있더라고요.
“지금은 마케터로 일하고 있습니다만, 내년에는 남반구에서 맘껏 뛰놀 예정입니다” 뭐 이런 식의 멘트를 했던 것 같아요. 그 짧은 꿈속에서도 어찌나 기똥차게 말은 잘하던지, 제3자가 되어 발표하는 저를 바라봤는데, 고 자식 말 하나는 기깔나게 잘하대요. 새삼 발표를 안 한지도 꽤 되었구나 싶습니다. 뭐든 계속해야 느는 건데, 제 능력이 퇴화될까 약간은 걱정이 됩니다.
꿈에서 그렇게 소개한 걸 보면, 지금 굉장히 자아표현에 목말라있는 것 같아요. 그리고 그럴싸한 사람이 되어 더 자신 있게 스스로를 소개하고 싶은 욕심입니다. 꿈에서 문득 교환학생에 힘주어 말하는 자신을 보고 가엽다 여겼어요. 아가, 어쩜 믿을 구석이 그게 전부니. 그러다 그곳에 다녀오고 나서 너 정말 큰일 난다.
길지만 짧은 24년을 살면서 깨달았잖아요. 목표가 사라지면 사람은 방황을 합니다. 지체되지 않기 위해선 오히려 꾸준히 꿈을 꿔야 해요. 다음 목표, 다음 꿈, 지치지 않을 나를 위해서.
그래서 전 좀 더 저와 솔직한 대화들을 시작해보려고 해요. 무얼 원하니? 무얼 하고 싶니? 뭐가 좋니?
평생에 걸쳐서 하게 될 문답들. 저는 죽을 날까지 나라는 사람을 완벽히 이해하진 못할 거예요.
때를 기다리는 자의 대기시간은 지루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만 방법은 쉬워요! 익숙해지기!
제 편지 발신 시간이 점차 느려지고 있다는 건, 그만큼 제가 이 루틴에 적응해가고 있다는 겁니다
시간이 생각보단 빨리 흘러서, 이 글짓기 시간을 자꾸 뒤로 미루게 된 거죠.
무튼. 오늘도 한 글자 한 글자 마음을 담아 보냅니다.
불규칙적으로 오는 서신들에 저는 오늘도 울고 웃습니다.
당신네들의 마음이 너무 애달프고 소중해요
안온한 하루 됩시다. 청명하게 눈부신 9월의 끝을 향해 힘차게 달려요
위로와 사랑을 여기에 두고,
2022년 9월 21일 PM 4: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