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휴직의 절반이 지나갔다.
큰 병인줄 알고 시작된 휴직이기에 1년은 너무 짧을 거란 막연한 생각을 했는데 그로부터 두 달 후 진행된 수술과 치료과정이 완전히 끝나면서 일찍 복귀하려는 마음이 컸었다.
그러나 그런 마음을 알아채기도 전에 두 아이들의
신나는 겨울방학에 돌입했고 나는 여느 때와는 다르게 긴 겨울방학을 온전히 아이들과 함께 하고 있다.
물론 양가부모님께 아이들의 끼니를 부탁하지 않아도 되는 자유로움이 좋다.
나는 13년 동안 워킹맘을 자처했고 양가어머님께서도 손주를 맡아주심을 자처하셨다고 믿었지만 어머님께 보낸 그 간의 문자들을 꼼꼼히 읽어보니
대부분의 내용이 아이들을 봐주실 수 있는지를 부탁하는 내용이었다.
대부분은 흔쾌히 허락해 주시고 아이들을 맡아주셨지만 부탁하는 내 입장에서는 말 꺼내기란 조금은 비굴했다.
통화가 아닌 문자라 내용이 그대로 남아 있어 곱씹어 읽으니 나는 철저하게 을의 입장이다.
문자가 아닌 통화로도 훨씬 많은 횟수의 부탁이 있었을 테니 그 간의 워킹맘 세월이 너무나도
가엽다.
선생님이 미쳐갈 때쯤 방학이고 엄마가 미쳐갈 때쯤 개학이란 우스갯소리가 있다.
그만큼 아이들을 돌보는 일은 힘들다.
육아는 끝이 없는 것 같다.
그리고 내 아이가 내 부모가 될 수 없고 내가 죽기 전에는 내 자식이 남의 자식이 될 수 없기에 내가 생을 다하는 마지막까지 이 아이들은 내 차지다.
갓난아이일 때는 말이나 하면 좀 낫겠다 싶었고 말하는 나이가 됐을 때는 혼자 다닐 수 있었으면 싶었고 혼자 다니기 시작했을 때는 밥 좀 알아서 먹었으면 싶었다.
물론 아이는 키우기 나름이겠지만 일하는 엄마답지 않으려고 아이들만 집에 두는 시간이 결코 없었다.
양가 어머님의 도움을 받거나 옆단지 친언니의 도움을 받거나 이도저도 안 될 때는 양육해 주시는
이모님을 고용했다.
아이들이 꽤 커버린 초등시절도 마찬가지다.
누가 들으면 다 큰 아이들을 ( 주변에서는 초등1학년만 돼도 혼자 다니고 혼자 집에 있는 아이들이 많았다.) 픽업하냐고 했겠지만 나는
정서적 외로움을 느끼지 않도록 하기 위해 내가 부재중인 일하는 시간에는 최선을 다해 부탁하고 또 부탁했다.
다행히 주변 가족들이 한마음으로 나를 응원해 줬다. 중학생이 된 시점에도 충분히 혼자 저녁 먹고 학원에 갈 수 있는 나이인데 어쩌면 혼자 있는걸
더 좋아할 나이가 됐는데도 옆단지 사는 언니가 본인집으로 보내라고 했다.
저녁 먹여서 학원 보내준다고......
심지어 새로 배정된 중학교도 우리 집에서 학교 가는 사이에 언니집이 있다.
다 차려놓고 냉장고에서 꺼내만 먹는 밥이겠지만 혼자 먹는 밥은 왠지 정서에 안 좋을 것 같다고 했다.
나는 처음부터 워킹맘을 자처(?)하면서 그것으로
부터 정해지는 삶의 패턴에 분명 아이들이 누릴 풍족함이 있으니 혼자 밥 먹는 것쯤이야 그것으로 퉁칠 수 있는 유연하고 강인한 아이가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지극히 어른의 생각인 것 같다.
이제 어느 정도 많이 커버린 아들은 집에 있는 엄마보다 일하는 엄마가 좋다고는 하지만 육아휴직을 지내고 있는 이 시점에 말수도 많아지고 키도 부쩍 크고 목소리도 변했다.
어쩌면 사춘기 시작을 온전히 알아차릴 수 있어서
기쁘다. 그리고 무엇보다 좋은 것은 함께 독서하고 토론하고 아파트에서 헬스를 하는 소소한 추억이다.
일을 했더라면 매일 저녁과 주말에 이 모든 추억을
숙제처럼 끝내려고 하지 않았을까?
시간이 많이 주어진 1년인 건 확실하고 여유가 생긴 것은 분명하지만 이번 육아휴직을 통해서 얻은 것은 내 일이 있다는 것에 소중함을 절절히 알았다는 것이다. 20년간 나는 어쩔 수 없이 직장에 다닌다는 생각이 컸다. 결혼이 출산으로 이어지고 한창 바쁠 때는 적당한 시기에 그만둘 수 있는 직업이 아닌 것에 불만인 적도 있었다. 그러나 아이들의 커가는 시기를 생각하면 또 나의 40대 출발선에서 생각해 보면 나는 내가 가진 것을 지켜내고 잘 마무리해야겠는 생각이 든다.
늘 나 자신을 위해 살았다고 생각했지만 그 중심엔
반짝반짝 빛나는 아이들이 있다.
크게 잘생긴 아들, 두 번 쳐다보게 생긴 빼어난 미모의 딸은 아니지만 언제나 보아도 질리지 않고 내 눈에는 늘 새롭다.
같은 얼굴이 늘 새롭게 느껴지는 것은 놀라울 정도로 신기하다.
평소에 아이를 별로 좋아하는 성격은 아니라 내 아이들이 이렇게 예쁠 줄은 몰랐다.
예쁨과 동시에 소중한 보물처럼 영롱하다.
내가 가진 그 어떤 보물보다 값지다.
아니 값으로 매길 수 없을 정도로 귀하다.
나는 나의 아이들과 오늘도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에 감사하며 내일을 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