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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상금과 맞바꾼 일상?취미용돈?

by 카라

어느덧 시간은 흘러 휴직 8개월 차 접어든 새벽

어느 날이다.

예고편 없는 영화상영처럼 어느 날 갑자기 시작된 휴직의 후반전!

아직은 4개월이나 남았으니 후반전은 아니지!

스스로 남은 시간을 애써 길게 늘여본다.


휴직을 처음 시작했을 때는 수술의 일정이 있었다.

당장이라도 떼어내야 할 것처럼 무시무시하게 크고

못난 혹이 생각보다는 안전하다 판단되어 두 달 가까이 미뤄진 수술을 끝내고 나니 본격적인 휴직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언제나 몸과 마음은 따로 놀아야 정석인지 몸은 이곳에 있지만 생각은 가끔 그곳에 가 있다.

아니 정확히 하루에 한두 번씩은 4개월 후의 내 모습이 그려졌다.

휴직과 동시에 떠난 사무실이기에 기억이 안 날만도 한데 20년 가까이해 왔던 일이기에 완전히 잊힐 순 없나 보다.

어떻게 보면 남들은 계속 걸어가는데 나는 멈춰 서 있고, 남들은 뛰어가는데 나는 걸어가는 것 밖에는 도리가 없어 조금은 섭섭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애초에 나는 가정이라는 가장 중요하고 소중한 울타리를 지켜내기 위해 일을 하더라도 가정 이외의 것은 최우선 순위가 아니었다.

그리고 나는 어차피 남들과 비교하며 살지 않는다.


정확히 휴직의 절반이 지난 시점

생활패턴이 어느 정도 익숙해질 때쯤

모든 것이 적응되어 가고 있는데

도통 통장의 잔고는 적응이 되지 않는다.

아무리 준비 없는 휴직이라지만 고정적으로 줄어드는 소득에 조금씩 기분이 상한다.

휴직과 동시에 1년간의 필요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나와 신랑은 식탁 앞에 마주 앉았다.

어떻게 하지?

나는 해답을 가지고 있었지만 신랑은 아무 생각이 없다.


나는 소비가 거의 없는 사람이다.

그리고 수입의 대부분을 저축하래도 할 수 있는

돈 모으는 선수이다.

쓰고 싶은 것을 참는다기 보다는 그냥 소비하고

싶은 생각이 별로 없다.

소비하는 것보다 쌓여가는 통장잔고는 나를 기쁘게 하기에 충분하다.

그러다가 나는 저축보다는 대출을 일으켜 갚아나가며 온전히 내 것을 만드는 것에 재미 붙였다.

그래서 20대 20평 집에서 30대 30평 집으로 40대 40평으로 수월하게 옮겨가는데 주력했다.

부모님의 도움 없이 스스로 이뤄냈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프라이드가 대단하다.

중간에 남편의 도움이 있었으면 조금 더 욕심냈을 것이다.


남편은 성실하고 착실하지만 소비가 좀 있다.

취미가 많고 하고자 하는 좋아하는 것에는 돈을 아끼지 않는다.

그래서 결혼초 매달 30만 원을 오직 취미용돈의 명목으로 주게 되었다.

그리고 나도 30만 원씩을 덩달아 챙기게 되었다.

본인은 어렸을 때 가난하여 지금 펑펑(?) 쓰는 것이 맞다고 우겨댄다.

정확히 얘기하자면 시댁부모님은 알뜰 그 잡채

라 그렇게 사는 삶이 무척이나 싫었다고 고백했다.

그리고 나는 그 고백을 기점으로 나와 결혼한 후부터는 하고 싶은걸 다 하도록 배려하기 시작했다.

나와는 다르게 취미가 있는 삶 자체가 신선했고 응원해 주고 싶었다.

성질 뻗친 나와 살아주는 착한 남편이기에 불만은 없었다.

결혼생활 13년 만에 그 좋아하는 자동차를

5번이나 갈아치우고 되지도 않는 그 시끄러운 락밴드 공연을 다니느라 특정 주말 한동안은 그렇게 바쁘게 보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면 남편의 과거는 가난했던 과거가 아니라 검소했던 과거이다.

그 당시 외벌이로 사시며 두 아이들을 키워내고

생활하신 시부모님은 내가 봐도 너무 훌륭하시고

법 없이도 사실 분들인데 그게 어떻게 직속 아들한테는 저렇게 전달 됐을까?

보통 소비패턴은 부모를 닮아가지 않나?

금쪽이가 따로 없다.


결과적으로 내 수입이 절대적이었기 때문에 잘 먹고 잘 살아왔지만 휴직으로 인해 조금은 균형이 깨져버렸다.

고정 지출 생활비만 해도 턱없이 부족한데 어떻게 하지?

화두를 던지는 순간

순간 남편은 얼굴이 하얘지고 입술엔 핏기도 보이지 않는다.

당장이라도 내 손가락에 힘을 줘 핸드폰으로

비대면 대출을 일으키게 할 판이다.

앞서 대출을 일으켜 자산을 넓혔다고 자랑했지만

더 이상 대출은 받기가 싫다.

생활비로 쓰이는 대출금은 왠지 모르게 짠하다.

그래서 나는 그동안 모은 13년간의 비상금을 고백했다.

매달 30만 원씩 13년 모은 비상금을 생활비로 투척했다.

남편 몫의 매달 30만 원 취미용 돈은 입금과 동시에 써버려 마법같이 사라졌지만 내 몫의 매달 30만 원은 차곡차곡 쌓여 필요한 순간에 마법같이 나타났다.

그리고 남편은 갑자기 나타난 마법에

이내 기분을 숨기지 못하고 코평수가 넓어지고 웃음을 간신히 참으며 컴퓨터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어떤 때는 시부모님의 검소함과 내가 일치되는 기분이 들어 조금은 민망할 때가 있다.

그러나 비록 아들은 깊은 부모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번개를 잘못 맞은 사람처럼 엉뚱하게 튀어 나의 경제상황을 어지르게 하지만 나는 검소한 우리 시부모님이 제일 훌륭하신 것 같다.

검소하신 한평생이 부정당하지 않도록 내가 잘 알아드리고 남편을 A/S 보내는 일은 없도록 잘 살아 보겠다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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