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의 끄적거림 '이 나라를 아십니까?'
요즘 한국은 대선정국이라 시끄럽습니다.
누가 대통령이 될지 모르지만 걱정은 걱정입니다.
어찌 되었든 나라 경제가 엉망이니까요.
저도 오늘 밤 비행기 타고 가서 투표하고 다시 나옵니다.
나라 걱정이야 인지상정이죠.
우리 삶에 많은 영향을 주니까요.
이런이런.
오늘의 끄적거림입니다.
제목 : 이 나라를 아십니까?
초등학교 때 기억이 난다. 2교시쯤 되면 빵을 바구니에 가득 담아 자전거 뒤에 싣고 학교로 오는 빵아저씨가 창문 너머로 보인다. 그러면 우리는 수업하다 말고 빵아저씨를 보며 환호성을 지르곤 했다. 빵으로 허기진 배를 채우던 시절이었다. 그 당시 우리 모두는 못 사는 국민이었다. 1인당 GNP가 80불이었던 나라 대한민국. 내가 태어난 1960년대 초는 필리핀보다도 못살았다. 서울에 있는 장충체육관이 그 당시 잘 사는 나라 필리핀에서 지어 준 선물이다.
이러한 대한민국에 첫 번째 서광이 비친다. 바로 서독이다. 당시 서독은 미국의 마샬 플랜 정책에 의해 어마어마한 미국의 원조를 받으며 라인강의 기적을 만들어 가고 있었다. 이런 서독에 필요한 일자리가 광부와 간호사였다. 서독 정부는 그 힘든 일을 하는 인력을 한국에서 송출해 줄 것을 요청했다. 우리나라는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왜냐하면 달러를 벌어들일 수 있으니까. 그 당시 조막만 한 한국 경제에 달러는 완전 가뭄에 단비였다. 너도 나도 광부와 간호사에 지원했다. 왜냐하면 월급이 장난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당시에 초등학교 선생님도 자신의 월급보다 3배를 더 준다고 하여 지원했는데 손이 깨끗한 사람은 면접에서 탈락시키니 자기 손을 연탄에 며칠 동안 문질러 거칠게 하고는 합격했다. 아무튼 서독 파견 광부와 간호사는 달러를 고국으로 보내면서 한국 경제의 초석을 다지는 데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서독에 나가 있는 우리 동포들을 위문하기 위해 가고는 싶었지만 전용 비행기가 없어서 난처한 터에 서독에서 비행기를 대 주어서 그걸 타고 서독으로 날아갔다. 머나먼 고국 땅에서 대통령이 온다는 소식에 광부와 간호사들이 강당에 모였다. 그리고는 대통령의 연설을 듣고 함께 애국가를 부르는 시간, 그러나 부르지 못하는 애국가였다. 왜냐하면 눈물이 앞을 가려 서로 부둥켜안고 우느라고 애국가를 제대로 부르지 못한 것이었다. 대통령도 울고 광부와 간호사들도 모두 울었다. 호텔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서독 수상이 울고 있는 박정희 대통령에게 손수건을 건네며 ‘우리가 돕겠소’ 하면서 위로를 해 주었다. 월급을 많이 받는다고 해서 머나먼 이국땅에 왔지만 천대를 받으며 각종 허드렛일은 도맡아 하던 광부와 간호사들이었다. 이렇게 한국 경제는 서독 파견 광부와 간호사들이 벌어들인 달러로 시금석을 다지게 된다.
서서히 일어나는 한국 경제에 또 하나의 호재가 터졌다. 바로 월남 전쟁이다. 그 당시는 베트남을 월남으로 불렀다. 미국의 파병 요청에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하루 저녁에 담배 두 갑을 피우며 고민했다. 왜냐하면 분명 한국의 젊은이들을 파병하여 달러를 벌어들이면 우리나라 경제발전에 강력한 드라이브를 걸 수 있는 자금이 생기지만, 전쟁 속으로 우리의 젊은이들을 밀어 넣어 수많은 이들에게 불행을 안겨다 줄 것이 너무 뻔하기 때문이었다. 한국군의 월남 파병은 당시 국제관계의 역학 구도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미국은 베트남 전쟁에서의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한국에 있는 두 개 미군 사단을 베트남으로 데려가려고 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한국 정부는 북한의 위협이 상존하는 마당에 미군이 빠져나가면 안보에 공백이 생길 것을 우려해 우리 국군을 미군 대신 베트남에 파병하겠다고 제안하게 된 것이다. 미국이 이를 승낙하였고 곧바로 1964년부터 월남 파병이 시작된다. 본 부대는 1967년부터 네 차례에 걸쳐 파병되었다. 맹호부대, 청룡부대, 백마부대 등이 파병되었다. 당시 사진을 보면 동해안 항구에 엄청 큰 배에 수많은 장정들을 싣고 떠나는 환호와 이별의 장면들이 많았다. 아무튼 베트남 전쟁 파병으로 한국 경제는 또 하나의 디딤돌을 발판으로 삼아 1970년대 경제로 넘어간다.
잘 나가던 한국 경제에 날벼락이 떨어졌다. 한국만 날벼락이 떨어진 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석유파동이 일어나면서 세계 경제가 고꾸라졌다. 1973년 석유파동으로 우리 경제도 휘청댔다. 그런데 위기는 기회라는 말이 있듯이 석유파동으로 돈을 끌어모은 중동 국가들이 대규모 사회간접자본 투자를 하면서 외국의 기술과 인력의 투자를 받았다. 이를 놓칠 리 없는 한국의 기업들! 너도 나도 중동으로 건너가 중동 건설 붐의 주역이 되었다. 기업이 가니 당연히 근로자들도 중동으로 파견되었다. 이 수많은 근로자들이 40도를 웃도는 사막에서 일을 해서 고국으로 달러를 부쳤다. 이 달러가 한국 경제에 세 번째 효자 노릇을 했다. 이렇게 하여 우리가 1980년에 달성하고자 한 100억 불 수출, 1000불 소득을 3년 앞당겨 달성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그렇게 맞이한 1980년 서울의 봄! 정치적으로는 박정희 유신정권이 김재규가 쏜 총탄에 막을 내리고 극심한 혼돈의 도가니였다. 그러나 경제적인 면에서 하나의 환호성이 터졌다. 바로 1988년 서울올림픽을 유치한 것이다. 이제 한국 경제는 옛날의 조막만 한 경제가 아니었다. 운동장에서 눈사람을 만들 때 눈덩이가 작을 때는 눈이 잘 안 뭉쳐지지만 어느 정도 커지면 그때부터는 눈이 잘 달라붙어 기하급수적으로 눈덩이가 불어난다. 1980년대 한국 경제도 비슷한 구조였다. 일정 수준 이상된 한국 경제는 날개를 단 듯 1980년대를 내달렸다.
특히나 1980년대 후반에 터진 3저 현상으로 우리 경제는 더욱더 치솟았다. 이른바 3저 호황 현상이라고 하기도 하는데 저유가, 저달러, 저금리 현상을 말한다. 1980년대 한국 경제는 그야말로 초고속 성장이었다. 1970년대에도 성장을 했지만 경제가 일정 규모 이상 된 상태에서 10% 성장은 그 차원이 다른 것이었다. 이렇게 우리 경제는 1980대 후반에 정점을 찍게 된다. 그러는 와중에 1992년 홍콩의 한 신문에 이런 기사가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한국인들이 너무 빨리 샴페인을 터트렸다고.” 우리는 그런 것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쟤네들은 왜 시기 질투를 하지? 이런 정도였다.
그런데 1980년대 후반 정점을 찍은 한국 경제에 서서히 문제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지난 시절 개발 붐을 타고 건설했던 성수대교나 삼풍백화점이 무너지는 대형 참사가 일어났다. 또한 경제에서는 온실 속 화초처럼 정경유착에 의해 커 온 기업들이 하나둘 무너지기 시작했다. 기업 도산이 잇따랐다. 1997년이 되자 거대 기업들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해 1월에 진로그룹이 도산했다. 4월이 되자 한보그룹이 도산했다. 거대 재벌이 날아간 것이었다. 그 당시 한국 경제의 마지막 카운터 펀치는 그해 7월 터진 기아자동차 부도였다. 이제 외국인 투자자들 사이에서는 “한국을 탈출하라.”는 메시지가 공유되었다. 우리나라 주식시장은 붕괴 수준까지 갔다.
그때의 에피소드를 하나 말하면 나도 주식을 하고 있었는데 삼성전자 주식에 몰빵을 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반토막이 난 원금을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가장 안전한 삼성전자에 몰빵을 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렇게나 많이 빠진 삼성전자가 그날도 하한가로 곤두박질쳤다. 하한가에 잔량만 수백만 주 쌓여 있었다. 나는 이제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그 잔량 더미에 내 주식 전부를 던져 놓고 수업을 갔다 와 보니 누군가 다 잡아가고 삼성전자는 하한가를 벗어나 올라 있었다. 그때 하한가 가격이 25600원이었다. 이런 주식이 오르고 올라 300만 원까지 갔다. 그때 보유했던 수량이 약 250주 정도로 기억되는데 끝까지 가지고 있었다면 7억 5천이라는 거금이 되었을 것이다. 주식이란 이런 것이다.
아무튼 그렇게 1997년 11월 한국은 IMF에 구제금융 신청을 하기에 이른 것이다. 한국은행에 외환보유고가 50억 달러가 되지 않아 우리나라의 쌀통이 빈 것이다. 쌀통이 비면 이른바 모라토리움을 선포하여 나라 파산 선고를 하게 되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그렇게 우리나라는 IMF 체제로 편입이 되었다. 이때 IMF에서 우리나라에 요구한 것 중 하나가 고금리 정책이다. 그때 기억으로 금리가 20%짜리도 많았다. 그래서 그 당시 강남의 부자들이 건배를 하면서 한 말이 “이대로”였다. 돈 많은 사람들은 그 돈만 굴려도 더 큰 부자가 되어 갔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서민으로 전락했다. 우리가 IMF를 겪으면서 사람들의 호주머니 사정이 정말 안 좋아졌다는 것을 피부로 느꼈다. IMF 전에는 고스톱을 쳐도 쩜에 천 원짜리를 쳤다면 IMF 이후에는 3579천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IMF 체제는 우리들을 가혹한 구조조정이라는 도가니로 밀어 넣었다.
그 당시 기억에 남는 장면이 은행원들의 구조조정이었다. 시중은행 5개가 파산했는데 예를 들어 동남은행 주식이 만 원에서 2천 원으로 떨어졌을 때 회사에서는 우리 은행을 살리자는 슬로건을 내걸면서 직원들에게 우리 동남은행 주식을 매입할 것을 독려했다. 그것도 자기 돈이 아니라 은행에서 융자를 잔뜩 해 주면서 자기 은행 주식을 매입하라고 한 것이다. 생각해 보더라도 만 원짜리 주식이 2천 원으로 떨어졌으니 살만도 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결국 그 주식은 200원으로 떨어졌고 나중에는 은행이 파산하여 200원도 못 받고 그냥 휴지 조각이 된 것이다. 퇴직금을 담보로 은행 융자를 받았던 은행 간부나 은행원들은 빚쟁이가 되어 회사와 함께 파산한 것이다. 이런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건설 업계 도급 순위 2위였던 동아건설이 날아갔다. 내가 아는 사람 중에도 동아건설 다니던 사람이 있었는데 나중에 중고차 매매상이 되어 근근덕신 살아가고 있었다. 이렇게 파산한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길거리에는 실업자가 넘쳐 났다.
이러한 IMF 시대에 드라마틱한 사건이 하나 터졌다. 바로 금 모으기 운동이었다. 1997년 12월 김대중 정부로 정권이 바뀌고 1998년 1월에 금 모으기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국민들 너도나도 장롱 속에 보관했던 돌 반지, 결혼반지를 들고 은행으로 달려갔다. 금이 곧 달러였기 때문에 금을 모아 우리나라가 IMF 체제에서 하루빨리 벗어나기를 기도하는 심정으로 달려간 것이었다. 그런데 이때 생각나는 것이 이 금 모으기 행사에 모인 건 죄다 반지나 목걸이 같은 작을 것들이었다는 사실이다. 금송아지나 금거북이 등 소위 부자들이 가지고 있던 금은 은행에 모이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게 우리나라 부자들의 현주소이다. 원래 역사적으로 한국의 부자들은 이렇게 행세하지 않았다. 독립운동 때 천석꾼, 만석꾼들은 자신의 전 재산을 털어 독립군 자금을 댔다. 언제부턴가 한국의 부자들은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하지 않는다. 천민자본주의의 민낯이다. 아무튼 금 모으기 운동은 우리 대한민국 국민들의 저력을 전 세계에 보여 준 쾌거이다. 금 모으기 운동과 강력한 구조조정으로 한국 경제는 IMF 체제를 조기에 졸업하는 모범생이 된 것이다.
한국 경제는 이 IMF를 기점으로 전과 후로 나눌 수 있다. IMF 이전이 관치금융과 정경유착에 따른 온실 속 화초 같은 기업이라면 IMF 후는 이제 노지로 나온 화초처럼 국제적인 경쟁력을 스스로 키워 가야 했다. 많은 우량 기업들이 IMF 이후에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국민들의 호주머니는 비어 갔다. 이때부터 비정규직이라는 용어가 생겨났다. 기업은 더 이상 개인을 기업의 주인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냥 필요할 때 쓰고 버리는 일회용품으로 생각했다. 많은 노동문제가 이때부터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러한 사회적인 분위기는 나라를 살려야 한다는 이념에 따라 개인의 희생을 정당화했다. 우리 개인들은 점점 더 가난해져 갔다.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