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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게으른 오후 Jan 13. 2020

화양연화에서 내 청춘의 흔적을 발견하다

1980년대 인생 소품들

어제 뒤늦게 화양연화를 봤다. 이상한 게, 잘 알고 있어서 이미 영화를 본 줄 알았는데 사실은 안본 경우가 더러 있다. 여러 번 회자되다보니 대강의 줄거리와 명대사 등을 꿰고 있는 경우가 있어서 당연히 봤거니 했는데 아닌 경우가 있다


화양연화 역시 그중 하나다. 영화 음악에서 국수통을 들고가는 그녀를 배경으로 한 음악이라고 하는데, 난 그 국수통이 떠오르지 않으니 역시 안 본게 틀림없다. 세기의 명화라고하는데, 나른한 주말 오후 시간이나 때우자 보는데 식구들은 10분을 못 넘기고 볼멘 소리를 하고 30분째는 각자 자기들의 볼일을 보러 떠나는데, 나는 초반부터 몇 장면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영화 줄거리나 배우에 관한 것은 너무나 많이 널려 있으니 그만두고 내게 특별한 것만 이야기하면



나를 화양연화로 초대한 문제의 국수통, 이 장면을 보기 전까지는 국수통을 마른 국수를 담는 걸로 생각했다. 어렸을 때 엄마 심부름으로 가곤 했었으니, 영화에서는 이미 다 만들어진 국수를 국물째 사는 것 같다. 보온도 될 듯하고





요걸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까? 양조위는 일간 신문 기자로 나온다. 저걸 보아하니 취재기자는 아니고 편집국인지. 배경은 1962년이다. 무려 내가 태어난 해고, 제작은 2000년이다. 1962년대는 저런 식자판을 사용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내가 출판사 입사한 해가 1985년이니. 당시 홍콩의 상황은 모르지만 출판에서 식자공이 원고를 보고 하나하나 식자를 뽑아 글을 만들던 활자조판시대를 거쳐 저건 식자조판시대이다. 그당시 근무하던 곳에서 제작비를 줄여보고자 저 기계를 들여놨는데 식자공의 숙련도에 따라 출력양이 계산되므로 한때는 우리도 같은 리듬으로 일하기도 했다. 저것은 비교적 처음 모델로 오른손에 잡은 손잡이를 누르면 종이에 글자가 찍힌다. 왼손으로는 식자판을 움직여 글자를 찾는다. 단점은 수정이 안 된다는 것. 깨끗이 수정하려면 똑같은 글자를 찍어서 그걸 오타난 자리에 그대로 오려붙여야 한다. 전문용어로 따블치기. 붙인 부분은 나중에 인쇄를 위한 필름으로 만들면 그림자가 생기기 때문에 또다시 찾아내 지워야한다. 요즘처럼 백스페이스 키만으로 수정하는 시대에는 상상하기 불가능.

다음단계가 컴퓨터 식자로 좀더 발전된 형태인데 수정이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잡지사 근무할 때 글자 한자 수정하려고 밤샌 기억이 부지기수다. 마감때는 모두가 바쁘고 모두가 급하기 때문에 순서를 철저히 지킨다  ㅠ



지금은 대부분의 원고는 어도비사에서 나온 인디자인 프로그램을 쓴다 . 정말 천지개벽, 상전벽해 수준이다. 첫음부분에서 저걸 본 순간부터 내 눈은 초롱초롱


두번째 장만옥이 사용하는 타자기, 요즘 영화가 나왔다면 나는 너의 타자기가 되고 싶어, 라는 가사가 나오고도 남을 듯

당시에는 왜 마라톤 타자기가 그렇게 갖고 싶었는지..하여간에 벼르고 벼른 끝에 마라톤 타자기를 손에 넣긴 했는데 다음부터 발전속도가 넘 빨라서 전자동 타자기 등장하시고 바로 컴퓨터 시대가 왔다. 하지만 돈 없던 시절 벼르고 별러 산 타자기였기 때문에 시대에 뒤처진다고 버릴 수가 없어 아직도 창고에 고이 모셔두고 있는데 몇년전 홋카이도 대학 박물관에서 유물로 진열된 것을 본 것은 안 비밀이다 (나 박물관급 유물 소장자)



요 장면은 1980년대 한껏 멋을 내고 나간 종로의 경양식집에서 돈까스나 함박스텍을 먹던 장면이 이러지 않았을까 샆다. 한눈에 보기도 촌스러운 세팅인데 왠지 낯익고 그래서 반갑기까지 하다



그리고 또 반가운 장면 책상위에 놓인 펜들과 글을 쓸 때 사용하던 잉크 찍어서 쓰던 펜들이다. 부피가 얼마 되지 않아 지금도 잉크랑 펜들이 그대로 책꽂이에 꽂혀 있다.



아 지나간 것은 모두가 아름답다. 옆길로 센 화양연화 감상기지만 삶의 지루함을 날려주기에 충분한 영화다. 또 생각해본다. 다시 산다면 잘 살아낼 수 있을까? 세상에 이처럼 부질없는 질문이 세상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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