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따듯한 한 끼 밥이다
공선옥 작가를 눈여겨보고 집중한 건 1990년대이다.
처음 공작가의 소설이 좋았던 것은 공작가에게서 강경애 작가의 향내가 나서이다.
무려 35년 전에 아무래도 소설을 하나쯤은 써야겠다는 생각으로 대학에 입학했다.
한국 소설을 처음 접한 건 그보다도 더 오래 전인 중학교 1학년 때였다.
당시 내가 다니던 서울여중(마포구 소재)은 독서 장려의 일환으로 삼중당 문고판 소설집을 한 학급 학생 수만큼 구입한 뒤 일정기간 동안 다 읽으면 그 책을 다음 반 같은 번호 학생에게 넘기는 거였다.
그때 근대소설이라 하던 우리나라 단편 소설은 다 읽은 듯하다. 이광수 염상섭 현진건 강경애 등등
당시에는 별 오락거리가 없던 터라 책읽기는 나로서는 최고의 오락이었다.
제일 고민하면서 읽었던 것은 이광수의 광염소나타. 추리 소설 버금가는 배경에 창작을 위한 범죄라니...후덜덜
한반에 70명이던 시절 10반이었으니 일 년에 10권은 의무적으로 읽어야 했다.
생각해 보니 이때의 경험이 나를 평생 책과 함께하게 만든 동기였던 듯
대학에 입학한 후에는 이문열의 <젊은 날의 초상, 1981>을 만났다. 이 책을 만나고 당시로서는 최고의 문장 훈련으로 알려진 대학노트 필사를 했다.
열심히 책 전체를 필사했던 듯. 유일무이하다. 지금으로는 엄두도 안 나는 무식한 작업이지만(쓴 사람도 있는 터에 사실 베끼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이후 대학 졸업후 출판사에서 일하면서 글을 쓰겠다는 생각은 사라졌다. 물리적인 책으로 세상에 남는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편집일을 하면서 깨달았기 때문이다. 활자로 남는 일은 누군가에게 좋은 자극이 될 수도 있지만 잘못된 글이 가져올 수 있는 해악은 너무나 엄청나다.
더불어 창작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고달픈 일인지도 잘 알게 됐다.
사실 지금도 글은 엉덩이가 쓴다고 생각한다. 글이 활자로 쏟아지기 전까지 작가의 내면에서 얼마나 곰삭아야하는 지도 잘 안다.
그렇게 써내도 편집자에게 좋은 소리 듣기 힘들다(이건 물론 제대로 된 편집자를 만났을 때의 일이다)
스타일은 다르겠지만 한번에 훅 뼈대를 세우고 그 다음에 흥미와 사실 묘사를 위한 살 붙이기, 그리고 전체와의 조화를 위한 점검, 사실 쓰고 또 써도 글쓴이는 욕심이 나서 계속 고치고 고치게 된다.
마지만 퇴고를 마쳤을 때까지도 아쉬움은 남겠지만.
나도나도, 소설 비슷한 것을 쓴 듯한 기억 아닌 기억이 있다.(이게 웬 망발? 그랬을 것 같다는 느낌이다.)
한창 결혼하고 애들에 치여 살 때 공선옥을 만났다. 공작가의 문장과 소설 아주 익숙했고, 내 경험상 그 익숙함의 끝에는 1930년대 작가 강경애에 닿아 있었다.
공작가는 1991년 《창작과비평》에 중편소설 《씨앗불》을 발표하여 문단에 등단하여 이후 여성의 운명적인 삶과 모성애를 그리고 소외된 삶을 따뜻한 시선으로 꾸준히 그리고 있다.
강경애를 아시나요? 지금도 첫 작품을 읽었을 때의 느낌이 남아 있다. 잠시 강경애 작가에 대해 소개를 하자면
-- 1930년대 식민지 한국의 빈궁문제를 작품화하여 우리 문학의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다. 대표작 <인간문제>는 사회의 최하층에 속해 있는 사람들의 비극적 삶을 그리고린 것으로서, <지하촌>은 당시의 극한적인 빈궁상이라는 사회적 모순을, 특히 작자 나름의 사실적 기법으로 상세히 묘사한 점에서 높이 평가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강경애 [姜敬愛]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나를 가슴 설레게 한 강경애는 졸업과 취업 결혼 육아로 정신없는 시간을 보내면서 빠르게 잊혀졌다.
그리고 나서 공 작가의 작품을 만날 때 강경애 작가를 떠올렸고 문학을 꿈꾸던 나의 풋풋했던 젊은 날을 떠올렸다. 나를 다시 인간 본연의 자아로서 되돌아보게 했다.
공작가의 작품은 그후 20여 년 간 나와 함께 헸다. 공작가의 책은 다 구독하게 됐고, 지금도 거의 초판본으로 내 방에 나와 함께 있다.
힘든 시절 공작가의 글 속 한 줄이 나를 잡아주어 버티게도 만들었다.
여담이지만 공작가를 만나 내 인생의 한 귀절을 들려주며 물었다.
--- 그 한 줄이 저를 살렸어요,
----그런 글이 있었어요?
(이런이런, 내 인생의 운명의 한 줄인데 작가에게는 그 많은 작품중 하나였던듯,
자세히 전후 줄거리를 이야기를 하고나서야 알아보신다.)
기억은 희미하지만 어미로서의 삶이 힘들어 애들을 버리고 가출했는데
돌아다니다 돌아다니다 다시 돌아온 곳은 자신이 버리고 떠나려 한 그 지겨운 삶이라는 것.
그 아이들이 어미를 기다리며 켜둔 한 줄기 불빛이었다, 라는 구절이었던 것 같다.
어미라고 무조건 아이들에게 헌신할 수는 없잖은가.
소설속 주인공은 가출 후 방황한 뒤에 다시 돌아와 안착한 것이고
나는 가출할 뻔한 시점에 그 글을 보고 마음을 돌려먹은 것 같다.
글로써 만족하기에 갈증이 나서 나는 공작가를 만나기를 소망했다.
하지만 익히 잘 아는 작가지만 현실에서 만나는 것은 또 다른 일이다.
독자가 보고프다고 불쑥 작가의 생에 들이닥친다면
또 그게 한둘이 아닐진대 딩사자는 얼마나 괴로울 것인가.
맹랑하게도 문학을 꿈꾸던 동창들은 등단도 하기 전부터 그런 고민을 해댔다.
아무나 나를 보고잡다고 찾아온다면 개인의 삶이 보호될까,
내가 유명해지면 미팅으로 만났던 옛애인들도 찾아와서 알은 체 할까 걱정이다, 라며 ㅋㅋ
혹시 공작가를 아는 분의 도움으로 만남을 가질까 하여
지주 드나들던 카페에 문의를 해봤지만 별 무소득.
그러다가 그러다가 편집일을 시작하면서 작가의 절판중인 책을 발견하고
편집자로서 새로운 기확과 편집으로 재발간하겠다는 연락을 취했고
그것이 <그밥은 어디서 왔을까> 제목을 달고 음식 에세이로 다시 선보였다.
오랜 팬으로서의 소망이 공식적으로 가장 바람직하게 이루어진 것이다.
<그 밥은 어디서 왔을까> 책을 볼수 있는 곳
일 한다는 명분으로 작가의 담양 집을 찾는 것에서 부터 안부 전화 등등.
작가님을 만나고픈 내 소망이 자연스레 이루어졌다.
책을 다시 편집해서 봄부터 계절별 식재료의 순서대로 배열하고 나니, 단순 고향의 옛날 식재료 이야기이던 것이 자식의 배를 곯리지 않기 위해 애면글면하는 어미의 생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이야기가 되었다.
또한 공작가의 엄마가 가지며 오이를 가지고 선옥이를 위한음식을 만들 때
나는 우리 엄마가 해준 부침개랑 김치찌개가 그리워졌다.
음식을 통해 어머니와 함께 했던 추억을 소환하며 지금은 안 계신 엄마 생각에 한동안 힘들었다. 그리고 엄마의 오이지가 너무나 먹고싶었다.
책을 만드는 내내 멀리 떨어진 곳에서 공부하는 따님과 소통하며 삽화를 받은 공작가는 행복해 보였다. 곁에 두고 살갑게 따뜻한 밥 한 그릇 제대로 먹이지 못한 아쉬움을 이렇게나마 풀 수 있어서 행복한 듯했다. 따님은 공작가와 같이 곡성에서 나고 자라 어머니의 추억이 자신의 추억과 많이 일치해서 공감이 갔다고 한다.
나 또한 내 어미를 회상할 수 있는 시간이어서 좋았다. 내 딸아이 또한 같은 공간에서 살고 있지만 직장일로 제때 집밥을 먹이기 어려운 것은 마찬가지여서 따뜻한 밥 한 공기 놓고 마주하는 게 소원이던 터였다.
언제 어느 곳에서 어떤 밥을 먹더라도 어미와 함께 하는 집밥을 잊지 않길 바랄뿐이다. 또한 밖에서 먹는 그 밥도 누군가의 수고로움 끝에 네 앞에 온 것이니 감사하며 먹고 그밥으로 몸과 마음을 허기를 채우라고 한다.(아, 이러면 너무 꼰대 같은가)
사실은 공선옥 작가와의 인연을 이야기 하고 싶어서 시작했는데
이런저런 잡다한 것 다 애기하게 되었다.
부디 이 글이 읽는 이나 쓰는 이나 시간 낭비가 아니었음을
어떤 일을 하든지 밥부터 먹고 기운 내시길
아무리 힘든 상황이어도 밥은 먹어야 하지 않은가
부디 한끼라고 아무렇게나 떼우지 말고
끼니 때마다 떨어져 있는 자식 생각하는 어머니
생각하며 따뜻하고 맛있는 한끼로 몸과 마음을 가득 채우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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