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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혜 Aug 19. 2019

그 여름, 성수동에서

작가와 창작 공간과의 만남

2017년 11월 - 그 여름, 성수동에서


 너무 더워서 지워버리고픈 여름이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사막을 걷는 기분으로 시간을 보냈다. 분명 사람 북적이는 서울인데, 나 만 혼자 황량한 땅에 서 있었다. 건조해 메말라 비틀어져버린 마음으로 웹 서핑을 하다가, 모래에 꽂힌 이정표를 하나 발견했다. 

 모든 이야기들의 안식처. 

 이렇게 따뜻한 단어들의 조합이라니. 게다가 한국 문단에서는 비주류로 평가 받는 장르문학 작가들을 위한 공간이라니. 쥐뿔도 없는 주제에 나는 내가 가진 돈 몇 푼을 후원함에 털어 넣었다. 

 며칠 후, 후원자를 위한 파티에 초대 받아 2호선 성수역에 내렸다. 평소 다니던 곳과는 거리가 있어 내겐 낯선 동네였다. 수제화를 진열해 놓은 크고 작은 가게들 사이로, 이제 막 오픈한 것 같은 감각적인 카페가 듬성듬성 섞여 있었다. 재잘거리며 지나가는 젊은 여자들 옆으로 제본을 가득 실은 트레일러가 소음을 내며 지나갔다. 철공소에서 쇠를 깎는 소리가 거칠게 들려오고, 자동차 정비소에선 이따금씩 쾅, 쾅, 굉음이 울려 퍼졌다. 

 작은 위로가 필요했다. 

 잘하고 있다고. 방황하지 않아도 된다고. 계속 글을 쓰면 된다는 말이 듣고 싶었다. 문단에서 인정하는 게 아니니 예술성으로 평가 받을 수 없고, 그렇다고 작품이 대중적으로 엄청난 성공을 거둔 것도 아니었다. 유명하지 않은 작가는 어쩌면 영원한 작가 지망생일지도 모른다. 

 이글거리는 공기를 들이켰다. 뭐라 정의하기 힘든 혼재된 거리. 끝을 알 수 없는 길을 구불구불 걸어 나갔다. 뜨거운 아스팔트를 내딛는 걸음이 녹아내려 그 여름, 그 곳으로 가는 길까지 한 발짝, 두 발짝, 보이지 않는 발자국을 남겼으리라. 

 길목마다 박살난 자동차들이 보였다.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일그러진. 망가지고 부서져서 다시는 달릴 수 없을 것 같은 차체가. 타이어가 빠져버린. 베인 살점처럼 백미러가 너덜너덜 붙어 있는. 코팅지에 붙어 간신히 형태를 유지한 금이 쫙쫙 간 차창이. 손끝으로 툭 치면, 와르르 무너져 내릴 것 같았던 그 차가. 그래, 그 때 그 길을 걷던 내 심정이 딱 그 고장 난 자동차 같았다. 

 정비소에 들어가는 마음으로, 무거워진 몸을 이끌고 안전가옥으로 들어갔다. 나무판자가 놓인 길을 징검징검 건너며, 손으로 조심히 갈대꽃들을 쓸어 보았다. 평화로웠다. 가게 오픈을 준비하는 이들이 부드러운 미소로 손님을 맞이했다. 그들이 내민 봉지에는 달콤한 과자와 안전가옥으로 가는 지도, 검은 연필과 성냥이 담겨 있었다. 

 봉지를 흔들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책들이 있는 서재. 비밀 책장을 열면 펼쳐지는 또 다른 서재. 12시면 뎅뎅 소리가 날 것 같은 괘종시계 뒤로, 숨겨진 조그만 자갈밭. 돌 밟으며 둘러보면 사방면 곳곳에 놓인 명작들과 그 책을 마주보는 내 모습이 반사돼 보이는 거울 방. 안으로, 안으로, 더 안으로, 사람들이 없는 그 곳에 들어가 앉아 보았다. 천천히 숨을 골랐다. 한여름인데도, 동굴 안처럼 공기가 차디찼다. 이곳엔 공간 자체가 주는 위로가 있었다. 시원하고, 홀가분했다. 그저 숨 한 번 크게 들이쉬었을 뿐인데. 

 몇 차례 수줍은 방문 끝에, 카페 사람들과 얼굴을 익히고, 틈만 나면 성수동에 와 천진하게 뛰어 노는 중이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발자국을 따라 이곳으로 모여든다. 각자 좋아하는 음료를 하나 옆에 두고 마음에 드는 책을 골라 읽는다. 입주하는 작가들도 하나 둘 늘고 있다. 독자와 창작자가 함께 있는 곳. 아무리 황량한 사막이라도 어딘가 오두막은 있기 마련이라는 듯, 이곳은 언제나 조용히 열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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