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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혜 Aug 19. 2019

말랑한 나날들

떡국과 글쓰기

2017년 12월 - 말랑한 나날들 

새해다. 

아침부터 일어나 재료를 손질했다. 부모님께서 보내주신 죽방멸치를 다듬어 살살 볶았다. 적당히 덥혀진 뚝배기 안에서 짭조름한 비린내가 올라왔다. 다시마 한 조각 잘라 넣고 물을 부어 보글보글 끓어오를 때까지 기다린다.  

어떻게든 시간은 흘러간다. 

빨리 지나가버렸으면 싶었던 한 해가 끝났다. 마음고생이 심했던 만큼, 삶이 두서없이 통째로 흔들렸던 만큼, 고생은 했지만 그만큼 단단해졌으리라.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여본다. 사춘기 땐 몸이 성장통을 겪고, 더 커선 마음이 다시 사춘기를 겪는다. 보이지 않아서 변화를 알아보기 어려울 뿐, 분명 내 안의 무언가가 더 강해졌다고 믿어본다. 

냉동실에 넣어둔 떡국 떡을 꺼냈다. 역시 지방 사시는 부모님께서 올려 보내주신 것들이다. 작년 가을쯤인가. 무튼 말랑할 때 먹으라고 주셨는데, 바빠서 먹지도 못하고 그대로 얼려두었다. 돌덩어리처럼 딱딱하게 엉겨 붙은 떡 뭉치를 찬물에 담근다.

시간이 지나고, 떡들이 하나 둘 물속에서 제 모습으로 돌아왔다. 새하얀 나뭇잎 같다. 건져내 물기를 뺀다. 체에 밭쳐 놓고 보니, 그 사이 육수가 바글바글 끓으며 거품을 내고 있다. 너무 우리면 안 좋다던데. 부랴부랴 멸치랑 다시마를 건져내고 팔팔 끓는 육수에 떡국 떡을 넣었다. 뜨거운 국물 속에서 떡들이 점점 말랑말랑해져 간다. 

이다음에 뭘 해야 하지. 

한 가지 요리를 만드는데도 여러 가지 품이 든다. 하나를 하고 있으면, 다른 하나를, 그 하나가 끝나면 또 다른 일이 기다리고 있다. 떡이 적당히 퍼지는 동안 대파를 어슷하게 썰어두고, 쇠고기 대신 넣을 장조림 고기들을 적당한 크기로 찢어 놓는다. 

요리를 할 때마다 느끼지만, 음식을 만드는 과정은 글쓰기와 비슷하다. 작품 하나를 준비하면 취재도 해야 하고, 자료 조사도 해야 하고, 레퍼런스가 될 만한 작품들도 읽어봐야 한다. 맛있는 요리를 만드려면 부모님께서 보내주신 재료들처럼 각각에 무진 정성이 들어가야 한다. 공을 들이면 작품이 좋을 수밖에 없다. 물론, 그 과정에서 너무 퍼지지 않게 적당한 긴장도 필수다. 

국자로 떡국을 슬며시 저어 본다. 대파와 장조림 고기를 넣고, 국간장으로 간을 맞춘다. 살짝 싱거운 거 같아, 소금도 조금 뿌린다. 얼추 완성되었는데 뭔가 비어보이는 기분은 뭘까. 글 쓰다가 막혔을 때 작법서를 찾아보듯 요리책을 펼쳐본다. 이런, 계란이 빠졌다. 어쩐지 떡국이 너무 맑기만 하더라.

지인에게 얻어온 유기농 계란을 톡톡 깼다. 작년에 계란 파동이 일어난 후, 어렵게 구해온 것이었다. 껍질 사이로 진노랑 노른자가 두 개나 흘러 나왔다. 올해는 무슨 좋은 일이 있으려나. 나무젓가락으로 계란을 풀어, 떡국에 조금씩 흘려 넣는다. 마지막으로 참기름 한 티스푼을 넣어 부그르르 끓여내면, 완성. 

무술년 새해 첫 떡국이다. 

부모님께 새해 복 많이 받으시라 전화 한 통 넣어 드리고, 홀로 식탁에 앉는다. 가지런히 놓은 수저 젓가락으로 김치와 함께 떡국을 먹는다. 조금 서툴지만, 좋은 재료로 정성껏 만든 요리. 입 안에서 느껴지는 떡의 쫀득함이 참 좋다. 올해는 이렇게 기분 좋은 말랑한 나날이 계속되기를 바라본다. 
  

[출처] [월간 안전가옥 12월] 말랑한 나날들 by 김민혜|작성자 안전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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