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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원율 Aug 27. 2021

남편 손을 잡았다…하늘을 날았다!

샤갈씨, 제 마음대로 해석해봤어요

"아…. 실은요. 밤마다 하늘을 날곤 해요."


"요즘 깊게 잠들지 못하는 것 같던데 무슨 일 있어요?" 여자가 물었고, 남자는 검지 손가락으로 천장을 가리키며 대답했다. 또 다른 손으로는 멋쩍은 듯 머리를 긁적였다. "그게…. 왠지 모르겠는데 속이 답답해서요." 남자는 이렇게 덧붙였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그녀는 그가 꺼낸 말에 대꾸할 가치도 느끼지 못했다. 여자는 남자가 새벽마다 몰래 침대에서 빠져나간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여보, 나 같으면 차라리 밤 산책을 간다고 하겠어요."


이 사람은 밤마다 몰래 어디 좋은 곳을 다녀오나. 여자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이 말을 던진 후 그의 표정을 봤다. 남자는 오늘 아침 뭘 먹고 싶냐는 일상적 질문을 들은 듯 무표정했다. 거짓말만큼은 기가 막히게 못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이 또한 착각에 불과했을 뿐이었다고 생각했다.


화라도 났으면 좋겠건만. 


여자는 그의 황당한 말을 듣고도 이상하리만큼 별 느낌이 없었다. 매일 듣는 이야기였다는 양 묘한 기시감이 느껴졌다. 그녀는 커튼을 치고 창문을 열었다. 새벽 물을 품은 야생 풀꽃 내음이 코 끝을 돌고 있다. 얼굴을 베개 속에 묻고 이불을 끝까지 올렸을 때 천과 솜 사이로 느껴지는 꼬순한 향과 비슷했다. 


호리호리한 이 남자는 여자보다 두 뼘 정도 더 컸다. 그는 안경을 코 끝에 걸치고, 손질 없이 헝클어진 머리를 늘어뜨린 채 그녀 곁에 서 있었다. 남자는 고민하는 듯했다. 눈을 지긋이 감았다가 떴다. "오늘 밤에요. 저랑 같이 가볼래요?" 그가 잠깐 뜸을 들이더니 꺼낸 말이었다. "그래요. 좋아요." 그녀의 대답이었다. 여자는 사실 "정말 미쳤어요?"라고 말한 후 가슴팍이라고 내리치려고 했다. 이 말 대신 고개를 끄덕인 건 미묘한 마법의 힘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 이미 쓰인 각본인양, 뜻과 상관없이 전개되는 연극배우가 된 느낌이었다.


남자와 여자가 함께 보낸 일요일은 어느 때처럼 평범했다. 


남자는 이불과 베개의 먼지를 탈탈 털어냈다. 여자는 그 사이 따뜻한 커피 두 잔과 마들렌을 꺼내왔다. 두 사람은 손을 잡고 교회를 방문했다. 그는 이후 글을 썼고, 그녀는 겨울용 스웨터를 만들었다. 이웃 부부와 저녁 식사를 함께 했다. 낮에는 작은 텃밭을 보살피고, 밤에는 개와 고양이를 쓰다듬는 선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김이 모락 나는 양파 수프, 아스파라거스를 곁들인 염소 고기를 나눠 먹었다. "오늘 밤은 쌀쌀해요. 따뜻한 옷을 챙겨야겠어요." 그가 잠자리를 준비 중인 그녀에게 말했다. 남자의 말을 듣기 전 여자는 '오늘 밤 하늘을 날기로 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검은 잔 밑바닥에 남아있는 연갈색의 커피 가루. 그 위로 흩뿌려진 반짝이는 설탕 알맹이들.


여자는 지붕 위에서 올려다보는 마른 새벽 하늘에 이같은 생각을 했다. 그녀는 발목까지 내려오는 검은 원피스 차림이었다. 찬 바람이 발목 사이를 스쳐갔다. 남자는 여자 앞에 섰다. 바람에 흩날리는 앞머리를 다독여줬다. 그는 그녀를 끌어안았다. "눈을 감고 가만히 있어요." 남자의 목소리는 피어나는 난로 연기처럼 따뜻했다. 장난은 이쯤에서 관두자는 말을 꺼내기 직전이었다.


여자는 자신의 몸이 점점 하늘 위로 떠오르는 게 느껴졌다. 처음에는 목마라도 타는 것 아닌가하고 생각했지만, 그러기엔 떠 있다는 느낌이 생생하게 실감났다. "이제 눈을 떠볼래요?" 그의 말에 그녀는 스르르 눈을 떴다. 뭐야…. 정말 하늘 위를 날고 있잖아. 남자는 깃털처럼 포근하게 웃었다. 여자는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고개를 숙여 마을을 내려다봤다. 걸음마를 뗄 때부터 수십년을 산 곳이다. 형형색색 성냥갑이 모여 있는 듯했다. 어릴 적 부모님에게 받은 크리스마스 카드의 풍경이 떠올랐다. 구름이 뿜어내는 촉촉한 향 덕분에 눈이 시렸다. 왠지 모르게 코 끝이 찡해졌다. 

마르크 샤갈, 도시 위에서

"이게 가능한 일이에요?" 


그녀가 물었다. 그는 대답 없이 더 높은 하늘만을 바라봤다. 여자는 평정심을 되찾았다. 매일 밤 남자와 함께 하늘을 날고 있었던 것 같은 기시감도 느껴졌다. 두 사람은 말이 없어졌다. 그들 곁에는 작은 새 몇 마리와 서늘한 공기만 맴돌 뿐이었다. 


여자가 침대 위에서 천천히 눈을 떴다. 


지난 밤에는 또 얼마간 남편과 함께 하늘을 날았던가.


그녀는 언제부터인가 잠들지 못하는 것보다 되레 잠이 든 후 깨어나는 순간이 더 괴로웠다. 고개를 돌려봤다. 남편의 자리는 여전히 차갑다. 그는 지금도 홀로 하늘을 날고 있는지, 장례식을 마친 후부터는 너무나 당연한 듯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여자는 평소 남편이 누워있는 자리로 몸을 움직였다. 아직 치우지 못한, 여전히 남편의 머리 냄새가 묻은 베개 위로 얼굴을 파묻었다. 요 며칠을 계속 그랬듯, 또 다시 울음을 터뜨렸다.




이 작품은 러시아 출신의 프랑스식 표현주의, 초현실주의 화가였던 마르크 샤갈(1887~1985)의 대표작 '도시 위에서'(1914~1918)입니다.


사실은, 슬픈 감정을 따라 만든 그림은 아닌 것으로 알려져 있지요. 그래도 한 작품을 보고 다양한 생각을 품는 것, 머리보단 가슴으로 이해해야 하는 미술 세계만의 특권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이 글은 순도 100%의 픽션이란 뜻입니다.


알고보면 샤갈은 이 그림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할 때 그렸다고 합니다.


그의 애초 의도를 따라 작품을 '좋게'도 봐볼까요?


하늘에 떠 있는 남자는 샤갈, 여자는 그의 아내 벨라 로젠펠트입니다. 1914년 결혼식을 올린 직후인 두 사람은 한 몸처럼 찰싹 붙어 있습니다. 


샤갈은 벨라를 안고 그의 고향 벨로루시의 비테프스크를 여행 중입니다. 소박한 목조 건물, 멀리서 보이는 정교회 대성당과 나무 울타리는 정겨움을 더합니다. 그 옆에서 엉덩이를 보이고 일을 보는 남자는 여유로움을 한층 더해줍니다. 성서, 러시아 민속예술, 유대인 공동체 문화를 모두 편히 스며드는 색깔로 표현합니다. 꿈과 그리움, 사랑과 열정을 담은 낭만화인 것입니다. 


샤갈은 1910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미술 공부를 하던 중이었는데, 그때 우연찮게 벨라를 만나 첫 눈에 반했다고 합니다. '나의 삶'이란 글에선 그 감동을 잊지 못해 "그녀의 침묵은 내 것이었고, 그녀의 내 것이었다. 그녀는 마치 내 어린 시절과 부모님, 내 미래를 모두 알고 있는 것 같았고, 나를 관통해 볼 수 있는 것 같았다"는 진한 문장을 썼다고 하네요.

마르크 샤갈, 산책
마르크 샤갈, 생일

그렇다면 두 사람은 그림을 그릴 때의 그 순간처럼 충만한 삶을 살았을까요.


그들은 그럴 수 있었지만, 세상이 그렇게 놔두지 않았습니다.


유대 혈통을 안고 있던 두 사람은 1917년 볼셰비키 혁명부터 1941년 제2차 세계대전 속 핍박까지 견디면서 순탄치 않은 생을 이어갔습니다. 


1944년, 벨라가 먼저 죽었습니다. 샤갈이 큰 명성을 얻는 것을 본 이후였지만, 숱한 탄압과 피난이 그녀의 몸을 병들게 한 이후였습니다. 감염병에 걸린 채 고작 3일 만에 숨을 거뒀습니다.


샤갈은 이후 41년을 더 살았고 재혼까지 했지만, 마음 한켠에는 늘 벨라와 함께 기쁜 마음으로 하늘을 날던 때를 담아뒀다고 합니다. 가족, 친한 친구들에게는 습관처럼 '도시 위에서'를 그렸을 당시 충만한 마음을 설명해줬다네요.


샤갈과 벨라

샤갈은 1985년 9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무덤은 프랑스 니스 시의 '샤갈 미술관' 근처 생 폴의 유대인 묘지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23편의 미술 이야기,


이미 유명한 빈센트 반 고흐, 폴 고갱은 물론 덜 알려진 빌헬름 하메르스회모리스 위트릴로에 '조선의 반 고흐' 최북 등 사연을 이불 속에서 즐기고 싶다면 『하룻밤 미술관』의 문을 두드려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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