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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원율 Aug 25. 2021

와 이 그림, 요즘 내 모습과 똑같네

호퍼씨, 언제 날 관찰했어요?

오늘밤 
그대에게
말로 할 수가 없어서
이런 마음을 
종이 위에
글로 쓴 걸 용서해
한참을
그대에게
겁이 날만큼 미쳤었지
<장혜진, 1994년 어느 늦은 밤>


어떤 그림에는 노래 한 곡, 소설 한 권, 영화 한 편이 서려 있습니다. 그 한 장은 물방울이 맺힐만큼 촉촉하고, 눈이 시릴만큼 절절합니다. 그래봤자 한 눈에 잡힐 종이인데, 감히 손을 대선 안 될 것 같은 분위기를 품습니다.


종이 위에 꽉찬 밀도를 남긴 화가, 특히 미국과 함께 우리나라가 가장 사랑하는 예술가, 에드워드 호퍼(1882~1967)는 이런 그림들을 그려냈습니다.



에드워드 호퍼, 자동 판매기 식당
난 너에게 편지를 써 
모든 걸 말하겠어 
변함없는 마음을 적어주겠어 
난 저 별에게 다짐했어 
내 모든 걸 다 걸겠어 
끝도 없는 사랑을 보여주겠어 
<이소라, 나를 사랑하지 않는 그대에게>


늦은 밤. 집 앞 카페, 골목길에 숨어있는 식당, 여행지에서 찾은 여관 사랑방, 고속도로 한가운데 자리잡은 휴게소…. 얄팍한 빛, 떠다니는 어둠 속에서 비춰지는 이 공간은 많은 곳을 떠올리게 합니다. 많은 이야기를 떠올리게 만듭니다.


마지막 찻잔 속에
서로의 향기가 되어

그대 내가
말로는 못하고
탁자 위에 눌러 쓰신
마지막 그 한 마디
<이문세, 이별 이야기>


한 여성은 홀로 앉아 생각에 잠겨 있습니다. 노란색 모자, 초록색에 깃을 세운 자켓 등 화사한 옷이 눈에 들어옵니다. 


분위기는 묘합니다. 


흔히 볼 수 있는 이 장면이 극적으로 다가옵니다. 사소한 요소들이 과감히 생략된 탓일까요. 간결하나 강렬합니다. 여성의 담담한 표정은 오래 들여다볼수록 말로는 못다할 이야기를 내뿜는 듯합니다. 무슨 생각 중일까요. 꽤 심각한 고민 같기도 합니다. 정신이 어디에 팔렸는지, 차를 마시기는커녕 잔을 다 들지도 못합니다. 창문, 탁자, 의자, 멀리 떨어진 라디에이터마저 고독함을 말합니다. 


그녀의 이름, 그녀가 이곳으로 오게 된 까닭…. 그 사연을 잠깐 상상해볼까요.


도시로 온 제시는 겨우 한 선술집에 일자리를 잡았지만, 우악스런 남자 무리에게 시달린 첫 출근 후 진이 다 빠졌다. 그만둬야 할까. 그러기엔 돈이 없고 의지할 사람조차 없다.
결혼한지 고작 3년이 된 수잔은 남편이 죽은 일이 믿기지가 않아 장례식장에서도 멍한 표정밖에 짓지 못했다. 주변 사람들은 독한 여자라고 수군거렸으나 그녀는 아무 생각이 안 들었다. 장례식을 마치고 침대에 누웠을 때, 그의 베개에서 아직 머릿내가 나는 듯했다. 수잔은 거울을 봤다. 그녀의 모습은 그녀가 아니었다. 속이 까맣게 타 곪아있었다. 예쁜 옷을 입고, 나름대로 화장도 했다. 기왕 이런 김에 차를 몰고 도시 외곽으로 몸을 옮겨봤다. 한 번도 간 곳 없는 휴게소를 찾아 싸구려 커피를 주문했다. 수잔은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스스로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의 손을 꼭 잡은 어머니를 보고 에밀리는 끝내 사랑한다는 말을 전하지 못했다. 1년이 지났다. 그녀는 여전히 아무런 표정도 짓지 못하고 있었다.


이 그림은 이 밖에도 많은 상상의 나래를 펼치도록 합니다.


그런데, 이런 절절함이 곧장 슬픔으로 이어지는 것 같진 않습니다. 되레 바닥부터 한 줄기의 온기 같은 게 피어나는 듯합니다. 생, 혹은 치유의 의지가 한켠에 묻어나는 것 같아서요. 


에드워드 호퍼의 '자동판매기 식당'(1927) 입니다.




내 별자리는 상처투성이 자리
내 혈액형은 a b o 또 a b 형
(...)
울고 싶을 땐 울어버리고
웃고 싶지 않을 때는 웃지 마 
<로시, Stars>


에드워드 호퍼(Edward Hopper·1882~1967)가 즐겨 표현한 것은 상실과 치유였습니다. 


상당수 평론가들은 호퍼가 사진같은 묘사, 자연광과 인공광의 조화를 잘 이끌어냈다는 데서 그를 사실주의 화가로 꼽습니다. 


단지 일상을 사실적으로 담았다고 해서 사실주의 화풍으로 묶일 수 있을까요. 


에드워드 호퍼, 뉴욕의 방

호퍼가 다큐멘터리처럼 그린 것은 일상 풍경이 아닙니다. 그가 정말 있는 그대로 그린 것은 '사람'입니다. 깊은 상실감에 젖은 사람이, 이를 있는 그대로 마주하는 그 모습을 꾸밈없이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는 아프니까 더 강해져야 한다, 장애물은 힘껏 밀어내야한다는 산업화 시대의 기조를 그림에 담지 않습니다. 아프면 웅크리고, 감상에 젖을 땐 눈물이 맺히는 게 인간이다, 이런 시간들도 보낼 수 있어야 탈 없이 훌훌 털 수 있다는 뜻을 표현합니다. 무거운 추가 가슴을 수차례 쓸고 내려갈 때, 애써 괜찮은 척 하지 않고 '나 아파요'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종이 위에 담는 것입니다.


그래서일까, 지금도 호퍼의 그림을 본 많은 이들은 눈물을 흘리면서, 한편으론 후련함을 느끼곤 합니다.




"나는 피카소를 모른다." (에드워드 호퍼)


휘슬러가 영국 런던의 안개를 만들 때, 호퍼는 미국 뉴욕에서 상실과 치유를 만들고 있었습니다. 


호퍼는 당시 유럽과 북아메리카 대륙에서 유행하던 실험적 작품들에 영향을 받지 않고, 자신만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 결과 이런 그림들을 남기게 된 것입니다.


렘브란트, 야간순찰

당시 많은 이에게 자극을 준 파블로 피카소는 누구보다 유명한 화가 중 한 명이었지만, 호퍼에게만큼은 영감을 주지 못합니다. 그는 그 시대의 아이돌인 피카소에는 1g의 관심도 두지 않고 되레 클로드 모네, 폴 세잔, 빈센트 반 고흐 등 인상파 예술가의 영향을 받습니다. 특히 렘브란트의 '야간 순찰'(1642)을 오랫동안 마음 속에 품었다고 합니다. 다만 영향은 영향일 뿐, 호퍼는 당시 열병처럼 나돈 어떤 화풍에도 속하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그는 자신의 실력에 자신이 있었습니다. 물론 힘들 때도 많았지만요.


1882년 미국 뉴욕에서 태어난 그는 이미 5살 때부터 드로잉에 두각을 보였습니다. 재능을 본 부모님은 물심양면으로 돕습니다. 뉴욕 미술 디자인 학교에서 응용 미술을 6년간 배웁니다. 1906년 24살 때 뉴욕 광고 회사에 취업하고, 같은 해 프랑스 파리로 유학을 갑니다. 4년간 3차례나 파리를 찾았지만, 그때마다 큰 감흥을 못 느끼고 돌아옵니다. 이후 1924년까지 광고 미술과 삽화용 판화를 그립니다. 포스터로 지역 1등 상을 받고, 삽화가로도 나름의 명성을 날립니다. 


1920년, 첫 개인전을 열지만 단 한 점의 작품도 못 팝니다. 그는 그럼에도 끝내 빛과 어둠으로 고독, 치유를 그리는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추구하기로 합니다. 언젠가는 될 것으로 굳게 믿고서요.


호퍼는 기다리던 그 시기는 1·2차 세계대전, 경제 대공황을 타고 찾아옵니다. 


미국 시민들은 전쟁과 대공황을 연달아 겪은 후 오롯이 지쳐 있었습니다. 상당수는 가족, 친구, 동료들을 잃었습니다. 옛 영광을 뒤로 한 채 거리에 나앉는 이도 부지기수였죠.


누구든 독을 마시면 본능적으로 약을 찾습니다. 미국 시민에게 당시 예술계를 강타한 입체파와 야수파 등은 그런 약이 되지 못했습니다. 마음을 맡기기엔 자극적이었으니까요.


그들은 그제서야 호퍼의 그림을 품기 시작합니다. 


에드워드 호퍼, 주유소
에드워드 호퍼, 밤샘하는 사람들

길, 도로, 주유소, 레스토랑, 버려진 집. 홀로 앉은 사람, 서 있고, 골똘히 생각하는 사람. 이들은 도시의 일상을 품고, 시민의 애환을 안고서도 한 줄기 빛을 보여주는 녹(綠)향이 나는 그림들에게서 카타르시스를 느낍니다. 그들만의 노래, 소설, 영화를 떠올립니다.


평범하고 일상적인 것을 그리워하게 된 미국 시민들은 그제서야 호퍼의 우직한 그림들이 건네는 말을 듣습니다. 


너는 괜찮냐고. 이 그림들이 일상의 비극을 예술의 비극으로 치유하는 데 가교 역할을 한 것입니다.




달 밝은 날에
하늘을 보면
우리 상처들이 떠있고
<그때의 나, 그때의 우리. 어반자카파>


호퍼는 결국 시대를 잘 만나 성공한 화가였을까요.


호퍼는 사실 이보다도 더 운이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곁에는 늘 신의 선물과도 같은 조력자가 있었으니까요.


에드워드 호퍼, 창 밖을 바라보는 여인


1924년. 호퍼는 미술 학교에서 함께 공부한 조세핀 니비슨과 결혼합니다. 호퍼의 그림 속 그려지는 절절한 여성의 대부분은 바로 조세핀입니다.


두 사람은 성격, 취향, 사상 등 모든 면이 상이했습니다. 호퍼는 결혼한 해 뉴욕에서 두 번째 개인전을 엽니다. 그의 작품은 모두 팔렸습니다. 당시 호퍼의 그림에 등장하는 모든 금발 여성은 조세핀이었습니다. 그의 그림에 걸맞는 완벽한 뮤즈가 돼준 것입니다. 호퍼는 그녀를 만나면서 전업화가의 길을 걸을 수 있었습니다. 조세핀이 호퍼를 건져올린 것입니다. 그녀는 이 외에도 그의 작품 소재를 찾기 위해 여행을 계획하고, 여러 예술품을 함께 감상하며 집요한 토론 상대가 돼주기도 했습니다. 한때 피카소, 몬드리안과 함께 나란히 거론되던 조세핀은 그를 위해 기꺼이 촉망받는 예술가의 꿈을 내려놓습니다.


에드워드 호퍼의 초상

예술인 기질이 다분했던 두 사람은 애증의 부부로 생의 막바지까지 함께 걷습니다.


호퍼와 조세핀은 80세 노인이 된 무렵, 병원에도 함께 입원합니다. 호퍼는 5층, 조세핀은 3층 병실에 있었지요. 호퍼는 매일 같이 조세핀을 만나기 위해 3층으로 갔다고 합니다. 


호퍼는 85세 생일을 맞기 2개월 전 자택에서 눈을 감습니다. 조세핀은 호퍼가 수년간 남긴 작품 2500여점을 휘트니 미술관에 기증합니다. 자기 남편의 진가를 처음 알아봐줘 고마웠다는 말과 함께요. 그녀는 1968년 3월에 사망합니다. 




호퍼의 그림들은 지금도 여러 분야에서 오마주(hommage)됩니다.


SSG닷컴은 강렬한 카피, 호퍼의 모던한 구성력과 알록달록한 톤 배치 능력을 끌어다씁니다. 배우 공유·공효진이 등장하는 이 광고를 론칭한 후 전년 동기 대비 매출이 20% 올랐다는 후문입니다.


영화 '셜리에 관한 모든 것'

2013년 작품, 오스트리아 출신 영화감독 구스타프 도이치는 영화 '셜리에 관한 모든 것'을 통해 호퍼의 그림 13점을 스크린에 완벽히 재연합니다. 주제 또한 도시인의 일상, 고독, 그리고 치유입니다. 


스릴러의 대가, 미국 출신 영화감독 알프레드 히치콕의 영화 '사이코' 등도 호퍼의 작품들과 익숙한 이미지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러고보면 호퍼의 작품, 또 노골적인 컷 없이도 다중적인 감정을 심어주는 히치콕의 영화 분위기는 서로 비슷한 듯하네요. 




이러한 23편의 미술 이야기,


이미 유명한 빈센트 반 고흐, 폴 고갱은 물론 덜 알려진 빌헬름 하메르스회모리스 위트릴로에 '조선의 반 고흐' 최북 등 사연을 이불 속에서 즐기고 싶다면 『하룻밤 미술관』의 문을 두드려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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