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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에서 내가 하고 싶은 말
by 이원율 Feb 15. 2018

제주에서 내가 하고 싶은 말 # 2

<약속>

#2.


 나는 어딘가로 떠나기 전 짐을 최대한 줄인다. 이것저것 챙기는 걸 좋아하지 않다 보니, 여행용 가방은 방 안 장식품이 된 지 오래다. 어딘가로 갈 때는 아디다스 운동 가방을 선호한다. 어깨 보호대와 손잡이가 있어 들고 다니기 썩 괜찮다. 무엇보다 마음에 드는 점은 보기보다(상상 이상으로) 많은 짐을 소화한다는 점인데, 그 수용량이 웬만한 미군 군장 못지않다. 운동할 때 쓰던 검은 운동 가방이니만큼 어디서도 위화감이 들지 않고, 튼튼한 건 두말 할 것 없다.


 3박 4일 일정을 잡고, 그 기간 조천읍에 있는 아프리카 게스트하우스에서 머물기로 했다. 휴식지를 제주도로 잡은 건 큰 이유가 없다. 가깝지만 휴식 기분을 내면서, 이곳을 벗어날 수 있다는 게 중요했다. 지쳐 있었다. 또 다른 이유가 있다면 그때쯤 눈이 무릎까지 푹푹 빠질 산을 가고 싶었다.


 "율아. 너는 다 좋은데, 너무 부지런해서 탈이야."


 미정은 '어디냐'는 내 전화에 늘 이런 식으로 대답한다. 약속시간 때문이다. 언제부터인가 신작 마블 영화는 영화관에서 함께 보는 게 약속처럼 돼버렸다. 그러다 보니 별일 없어도 3~4개월에 한 번씩은 꼭 마주한다. 어린 시절부터 몸에 배어버린 모양인지 나는 웬만한 폭풍우가 몰아치지 않는 한 약속 시각을 꼭 지킨다. 아니, 그보다도 기다릴 걸 알면서도 10~15분 정도 더 일찍 나가는 게 습관이 돼버렸다. 약속시간에서 10~15분, 그 시간쯤 되면 흰 모찌 얼굴을 한 미정이 깨금발로 다가온다.


 네 시간이 소중한 만큼, 다른 사람 시간도 소중하다…. 맞는 말만 도라에몽 호주머니를 뒤적거려 꺼내놓던 한 사람의 말 때문일까. 다만 이는 나에게만 엄격할 뿐 다른 사람은 10분이든 30분이든 늦어도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그 사람도 나름대로 사연이 있다. 실제로 이 친구를 더해 내가 좋아하는 친구들은 대부분 시간관념에 매우 취약하다. 그런 건 있다. 처음 만나는 순간에서, 이 부분을 지키지 않는 게 보인다면 그 사람에 대한 점수가 크게 깎여버린다.


 생각해보면 일찍 나가서 손해 본 건 없다. 중간쯤 '아차' 싶어 잊고 나온 게 있다면 되돌아갈 수 있고(이런 일은 없는 게 좋겠지만요), 헐레벌떡 뛸 일이나 버스ㆍ지하철을 기다리느라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덕에 여유로움을 품고 갈 수 있다. 택시 탈 일도 없어진다. 이번에도 그리 서두르지 않았는데 도착하니 시간은 넉넉하다. 오전 11시 비행기를 기다리며 공항에서 샐러드를 사 먹었다. 그리 신선하진 않았지만, 양상추와 토마토가 전해주는 묘한 물기가 몸을 가볍게 만든다. 비행기는 30분 연착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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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gazine 제주에서 내가 하고 싶은 말
그림 읽어주는 경제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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