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원율 Feb 23. 2018

제주에서 내가 하고 싶은 말 # 3

<결핍>

#3.


 한라산을 가겠다는 생각 외엔 계획이 없다. 자동차는커녕 자전거나 오토바이 한 대마저 없다. 제주도의 악명 높은 대중교통을 몸소 체험하게 된 것이다.


 공항에서 숙소까지는 버스로 1시간 30분이다. 그 사이 두어 번 환승도 해야 한다. 아닌 사람도 있다지만, 나는 대중교통 안 이동시간을 즐기는 편이다. 아무것도 안 한다고 해도 죄책감이 없는 몇 안 되는 순간이다. 음악을 듣거나 바깥 풍경을 구경한다. 해안도로를 곁들여 지날 땐 햇빛이 부서지는 바다를 쳐다본다. 창문을 열어보니 코가 시큰할 만큼 짭조름한 소금 냄새가 난다. 큰 감상은 없다. 그저 빌딩 숲이 아닌 해안가로 왔다는 생각이다.


 방향 감각이 탁월한 건 아니지만 나는 대개 휴식지 내에서는 길을 잘 찾는다. "야. 타지에서 길 잃어 죽으면 안 돼"라며 몸속 세포 하나하나가 평소 제 기능의 백 오십 퍼센트는 쓰는 느낌이다. 남들이 찾기 힘들어 헤매는 숙소나 몇몇 거점들도 척척 찾아낸다. 이런 점이 되레 혼자 어딘가에 돌아다니는 데 두려움을 덜어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게스트하우스에서 10여 분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식당에 들어가 밥을 먹는다. 멀건 잔치국수에 돼지고기 몇 점이 들어가는 7000원짜리 고기 국수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국수 면발에 고기를 얹어 성실히 입에 넣는다. 배추김치와 깍두기가 아삭아삭하다. "저희가 직접 담그는 거예요." 싹싹해 보이는 주인이 자랑을 곁들여 말한다. 지쳐있는 상태에서 맛을 음미하기는 쉽지 않다. 휘발유 탱크에 평소 담지 않은 연료를 채우는 느낌이다.


 기실 내게 빈 시각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 계기는 간단했다.


 결핍이다. 세상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감정이 이끼처럼 내 머릿속에 스멀스멀 피어오른 탓이다. 결핍은 '있어야 할 것이 없어지거나 모자람'이란 말로 정의된다. 없어지거나 모자란다는 건, 있던 것을 다 써버렸다는 이야기다. 이에 따라 이 단어의 두 번째 사전적 정의는 '다 써 없어짐', 이 다섯 글자다. 나는 차곡차곡 쌓아뒀던 감정들을 적재적소에 성실하게 소비했다. 채움의 틈이 없다 보니 감정의 항아리는 쉽게 밑바닥을 드러냈다.


 그럴수록 깊은 곳에 묻어뒀던 건강하지 않은 감정들이 차올랐다. 이는 질투, 갈망, 나약, 헛된 희망 등을 뜻한다. 솔직히, 내게 아직도 그런 감정이 그토록 짙게 남아있다는데 놀라기도 했다.


 나는 아직 멀었다. 집어삼켜서는 안 될 그 감정들은 밀려오기만 한 채 빠지지 않는 파도처럼 덮쳐왔고, 나는 빠져 죽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허우적댔다. 나를 둘러싸는 고유의 색은 옅어졌다. 애초 많은 무기를 갖고 살기 힘든 나에게서 그 분위기도 없으면 생존력은 크게 떨어진다.


 단 하나의 생각에 몰두하면서, 열여덟 살의 아이는 제일가는 현자들에게도 결해 있는 힘을 얻었다. 그는 모든 것을 경멸하거나 무시할 수 있었다.
<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회상록>


 내 몸은 징조가 있을 때 신호를 보낸다. 이명(耳鳴)과 끝없는 악몽이다. 나는 잠에 깨어서는 이명으로 흐릿한 순간들을 견뎌내야 했고, 잠이 들 땐 악몽으로 뒤척였다. 더 비극적인 건 두 증상 모두 티가 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제주에서 내가 하고 싶은 말 # 2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