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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에서 내가 하고 싶은 말
by 이원율 Feb 25. 2018

제주에서 내가 하고 싶은 말 # 4

<고요>

 #4. 


 일정은 없다. 


 챙겨온 짐도 아이젠과 바람막이 등 등산 장비뿐이다. 식사를 한 뒤 게스트하우스에 짐을 풀었다. 오후 2시부터 4시까지 두 시간쯤 잤다. 그다음 여기에서 가까운, 가장 그럴듯한 산책로를 찾았다. 함덕해수욕장과 잔디공원을 지나가면 서우봉이라는 100m 남짓한 봉우리가 있다. 이곳에서 걸어서 한 시간쯤이다. 시간은 차고 넘친다. 나는 점퍼를 입고 회색 목도리를 두른 채 해안도로를 따라 차근차근 움직였다. 


 수평선을 따라 비릿한 바닷냄새가 머리카락을 헝클인다. 그녀가 벌린 두 팔이 내 수평선의 전부였다…. 어릴적, 자코브의 시를 읽고 사전에선 수평선을 어떻게 묘사했을지 궁금해 찾아본 적이 있다. 사전은 수평선을 '하늘과 바다가 닿아 경계를 이룬 것처럼 보이는 선'으로 서술했다. 서로 알 수 없는, 서로 너무 달라 섞일 수도 없는 하늘과 바다가 닿아 일직선으로 나아가며 여운을 남기는 것. 북극성과 무지개처럼 세상 어딜 가도 우뚝하게 볼 수 있는 것. 수많은 민족 중 '수평선 같다'라는 언어를 쓰던 곳도 있지 않았을까. 나는 그 문장에서 외로움을 느꼈다. 


 서우봉을 향해 한참을 걸었다. 많은 사람이 스쳐 지나간다. 많이 쳐줘도 직장인 새내기인 것 같은 커플, 시끌시끌한 가족, 두 손 잡고 바닷물을 훑어 걷는 부부, 잠깐 일행과 떨어진 건지, 애초 혼자였는지 서로의 밤을 조용히 걷고 있는 남녀. 모두 인생의 한 장면을 찍기 위해 이곳을 찾았다. 



 언젠가 가정을 꾸린다면 가족과 함께 여러 곳을 찾을 것이다. 유년 시절을 보낸 논공읍의 개울가와 들판, 풀피리를 불고 어린 소와 함께 놀던 고령군의 우사(牛舍)부터 도시 학교, 구색 갖춘 첫 직장생활을 한 DMC, 매번 가슴 속에 품는 남산의 전망대, 스쳐 지나가며 나를 보듬었던 많은 공간. 훈계나 교훈 따위는 집어치우더라도 함께 하고 싶은, 함께 해야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들과 지금보다 더 불완전한 과거의 나를 마주 하고 싶다. 물론 허락된다면 나 또한 그 사람들의 추억을 함께 밟으면서. 


 '밥 몇 번 같이 먹고,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하고, 술 몇 잔 같이 마시고….' 한 시인은 두 사람이 가까워질 수 있는 가장 빠른 방법을 이런 세 마디로 표현했다. 쌩뚱 맞지만, 갑자기 생각이 났습니다. 


 부모님의 모습으로 자식이 이성 친구 대하는 법을 익히는 게 맞다면, 나는 상당히 모범적인 부모님을 만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부모님은 아직도 외출할 때 손을 꼭 잡는다. 내가 듣든 말든 서로를 애칭으로 부르면서 함께 여행ㆍ운동도 자주 다니신다. 어쩌다 두 분 중 한 분과 따로 밥을 먹으면 상대방을 자랑하느라 바쁘다. '너희 아빠가 난을 보살피니 쑥쑥 큰다. 손재주가 얼마나 좋니', '너희 엄마가 그간 자격증을 두 개나 더 땄다. 네가 엄마 머리를 닮아서 참 다행이다'는 등 판을 깔아주면 끝이 없다. 내가 먼저 한숨을 내쉰다. 



 평생 그런 모습을 봐서인지 나는 모든 부부가 그런 줄만 알았다. 사회생활을 하다 보니 이 세상엔 결혼 기간은 차치하더라도 안 그런 부부가 꽤 된다는 걸 알게 됐다. 좋은 점인지 나쁜 점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 덕분에 나는 결혼에 대한 거부감이 다른 또래들보다 적다. (다만 거부감이 없다는 점과 결혼을 하고 싶다는 점은 별개 내용이다) 이성을 보는 눈과 나름대로 기준도 쉽게 세워졌다. 


 "홀로 꼭대기에 올라 생각하는 거야. 어떤 일이든지 제힘이 없으면 할 수 없다고. 그런데, 누구든 언젠가는 그 산에서 내려와야 해. 진짜 삶은 마을 속에 있거든." 이 말을 한 주인공이 내가 스물두 살 무렵 서른 살 언저리에 있던 성혜 누나였나, 주연 누나였나. 


새 나막신을 샀다며 
친구가 불쑥 찾아왔다 
나는 마침 면도를 다 끝낸 참이었다 
두 사람은 교외로 
가을을 툭툭 차며 걸어갔다 
<가야마 쇼헤이, 가을> 


 겨울을 툭툭 차며 서우봉을 걷는 황혼 부부를 보자니 온갖 생각이 다 난다. 그들은 잘 익은 곶감처럼 짙게 물드는 노을, 저 멀리서 어린애가 쓱 쓱 밀어내며 웃음을 터뜨리고 있을 것만 같이 엉망으로 밀려오는 파도, 손님을 맞아 두 뺨을 부벼주는 바닷바람, 간간이 들리는 알 수 없는 새 소리를 모두 담아가려는 듯 아주 천천히 걸었다. 자식은 그럴듯한 직장에 자리 잡고, 결혼까지 해 손주를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거 봐요, 얼마나 귀여워요." 돌아오는 길에 다시 만난 그 부부가 영상통화를 하는 듯 스마트폰에 얼굴을 모으고 있는 모습을 보니, 더욱 그런 느낌이 난다. 


 고요함을 즐겼다. 


 올라가는 길목에 유공자를 위한 공동묘지가 있고, 그중 몇몇에는 눈보다 더 하얀 꽃다발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한 사람이 아직 한 사람을 잊지 않고 있다는 증거다. 산 사람이 죽은 사람에게 무언가를 주면 그 양은 10배가 돼 하늘나라로 간다고 한다. 술 한 잔을 주면 술 열 잔, 멜론 열 개를 두면 멜론 백 개. "그러니까," 그다음이 와닿았다. "소중한 사람이었다면 종종 꽃다발을 하나씩 두고 가세요. 그 사람이 당신 향이 담긴 꽃밭에서 종일 거닐 수 있도록." 책에서 본 말이다. 


 꼭대기에는 2012년 영국 영화 <나우 이즈 굿>에서 테사와 아담이 머물렀을 법한 나무 의자가 한가운데에 있다. 날이 풀리면 뽀얀 유채꽃이 구름처럼 피어날 것이다. 탁 트인 바다를 보니 제주도에 온 실감이 난다. 바람은 텅 비어있다. 늘 이런 장면을 보면 그렇듯, 함께 있고 싶은 사람들의 얼굴이 하나둘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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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gazine 제주에서 내가 하고 싶은 말
그림 읽어주는 경제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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