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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원율 Mar 03. 2018

제주에서 내가 하고 싶은 말 # 5

<만남>

 #5. 


 아프리카 게스트하우스는 이름만큼이나 독특한 곳이다. 


 따로 2인실 방도 있지만, 대부분의 게스트는 다락방이 얹어져 있는 한 공간에서 잔다. 칸막이도 없다. 마치 군대 내무실이 차곡차곡 포개진 느낌이다. 그렇게 사생활이 보호되지 않다 보니, 되레 이곳에선 자연스럽게 (호텔을 못 간) 사람들과의 만남이 쉽게 이뤄진다. 침상에서 두어 발자국 지나 있는 난로를 건너 식탁에 앉으면 거의 모든 게스트를 한눈에 볼 수 있다. 난로 연료는 장작이다. 네면 기둥에는 그간 다녀온 사람들의 폴라로이드 사진과 편지, 명함, 그림 등이 빼곡히 찍혀있다. 


 시설이 다른 게스트하우스보다 좋다고는 할 수 없는 덕에, 재방문한 게스트 혹은 입소문을 타고 온 게스트 등 미리 정보를 알고 오는 사람이 상당수다. 처음 어색함만 잘 떨친다면 아는 사람들만 아는 베이스캠프가 된다. 그들은 이곳을 줄여 '아게하'라고 부른다. 매일 밤 게스트들은 회비를 걷어 음식을 나눠 먹는다. 신흥리의 바다를 낀 덕에 문만 열면 탁 트인 바다를 볼 수 있다. 식탁에 앉아 바다 냄새가 밴 밥과 반찬을 먹다 보면 타지에서 느껴지는 특유의 위화감은 잦아든다. 여행가 기분보다 현지인 느낌이 강렬히 다가온다. 스케줄 북 가득가득 채운 사람보다는, 별생각 없이 쉬러 오기 적당한 장소다. 매일매일 새로운 사람들과 음식을 나눠 먹을 기회도 생기니 생각하지 못한 영감을 얻기도 좋다. 요즘 같은 비수기(非需期)에서는 이곳을 찾는 게스트가 많지 않아, 거창하지 않게 고즈넉한 분위기를 즐기기도 적당하다. 



 이날도 게스트 대부분은 서로서로 아는 것처럼 보였다. 


 그 분위기를 파악하기 위해 나는 게스트가 훤히 보이는 탁자 한가운데 앉았다. 보기에는 어색하고 대담해 보일 수 있는 행동이나, 애초 그런데 신경을 쓰지 편이다. 


 한 게스트가 맞은 편에 앉아 자연스럽게 귤을 까먹는다. 이따금 머리를 쓸어내린다. 얼마 뒤 나도 함께 귤을 까먹는다. 몽실몽실한 게 딱 말랑말랑하고 새콤하다. 10여 분 뒤 한 게스트가 대각선 방향으로 앉고, 또 다른 게스트가 옆에 앉는다. "'루미큐브'(보드게임의 한 종류) 할 줄 알아요?" 내게 묻는다. "잘 몰라요." 내가 대답한다. "가르쳐줄 테니 배우세요." 끄덕. 귤을 나눠 먹고 루미큐브를 하면서, 게스트하우스의 일원이 된다. 사람 대 사람으로 당연한 도리지만, 첫 대면을 하는 사람들도 차분히 응대하면 대개 경계심을 풀어준다.


 고마운 일이다. 스쳐 지나가던 사람들은 이렇게 인생의 조연이 된다. 


 이날 모임에는 게스트 14여 명이 모두 모였다. 난로 옆에 긴 나무탁자를 이었다. 이들 모두 휴식지가 주는 해방감을 즐길 줄 알았다. 음식이 놓였다. 직접 만들어진(것으로 추정한다) 떡볶이가 주요리다. 이쪽 자리에는 지방에서 공직생활을 하는 H 씨와 그 일행(한 분은 S사 직원, 한 분은 군인 장교였다. 여행지에서 만난 인연이 종종 그렇듯 얼굴은 또렷이 기억나나 이름은 생각나지 않는다), 아까 같이 귤을 까먹던 교사 J 씨, 위생사 L 씨 등이 둘러앉았다. 


 어색함은 오래 가지 않는다. 대화 소재는 호기심이다. 서로 세계를 알고 싶어 했다. 누군가는 막 그 세계에 들어왔고, 누군가는 이제야 일이 손에 붙는 중이고, 누군가는 그 세계를 떠나려는 중이었다. 분위기가 무르익을 때 즘에는 '붕' 뜨는 분위기가 조성된다. 어디 앉고 누구에게 말 붙여도 첫 대면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시점이다. 달빛의 느낌으로 보건대 그 시간대는 오전 1시를 막 넘어가던 때였다. 루미큐브를 같이 하던 형은 오늘은 사람이 너무 없어 아쉽다며 툴툴댔다. '저는 이 분위기도 좋아요.' 말을 하려다가 정말 슬픈 표정을 짓고 있는 탓에 다시 집어넣었다. 



 인연을 만나려는 패기로 온 것이 아니다. 애초 그런 건 서툴다. 나는 잔잔하게 말하고 고요하게 들었다. 클래식과 어쿠스틱 음악이 번갈아 나왔다. 눈에 젖은 나무 냄새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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