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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원율 Oct 03. 2020

"감히 내 앞에서 멀어지지 말라"

<14. 구스타프 클림트, '키스'>

   내가 트라야누스 황제의 후계자로 지목 받았을 때, 모든 로마 시민들이 놀랐으리라고 생각한다. 나도 내 악명을 안다. 본성 자체가 유하지 않은 탓에, 어디서든 뜻대로 되지 않는다면 마음껏 소리치고 때려부쉈다. 필요할 땐 모멸적인 인신공격도 서슴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내 머리 위에 언젠가는 왕관이 얹어질 것으로 확신하고 있었다. 나는 기약 없이 전장에 있을 때도 로마를 그리워하지 않는 단 한 명의 장수였다. 그 향수(鄕愁)를 놀이로 바꾸고는 그 안에서 즐거움을 끄집어낼 수 있는 유일한 귀족이었다. 스스로 팔과 다리 뼈를 부러뜨릴지언정 목표한 바는 반드시 이뤄내는 마지막 전사였고, 그럼에도 손에서 책을 떼지 않는 최후의 책사였다. 나는 태어날 때부터 병사의 그릇이 아니었다. 끝내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죽이지 못한 코르넬리우스 술라는 적일 때는 악몽, 아군일 땐 더할나위 없는 축복이란 평을 받았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나를 상관으로 마주하는 일은 악몽이겠지만, 내가 군림하는 군(軍)과 제국이 하나의 큰 생명체였다면 이들은 내 손길을 더할나위 없는 축복으로 여겼을 것이다. 적군의 입장에선 그 자체가 최악의 악몽이었을 것이다.


   트라야누스 황제는 현명했다. 정확히는 황제의 왕비인 플로티나가 더 현명했다고 보는 게 맞다. 몇 명의 후보군을 놓고 고민하던 황제가 결국은 그녀 뜻을 따라 나를 후계자로 둔 것이었기 때문이다.


   몇 년 전 출정식 날, 왕비와 장수로 처음 마주했던 그때부터 그녀는 나를 꿰뚫어볼 줄 알던 유일한 인사였다.

   세상에서 가장 은밀하고, 가장 성스럽게 맺어지는 사랑은 무엇일까. 나는 지성으로 맺는 사랑이라고 확신한다. 맹세하건대 나는 그녀를 두고 단 한 번의 사적인 욕망을 품은 적이 없다. 개화기(開花期)를 맞았을 땐 누구보다 아름다웠을 그녀는 이제 지는 꽃이었다. 지금은 황혼의 시간을 맞는 중이었다. 그럼에도 그녀가 품은 지성은, 화창한 일요일의 아침만큼 고결했다. 꼿꼿한 등은 우아했다. 나는 청초한 풀잎 위 그 물망울을 함부로 건드릴만큼의 야만인이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온화하게 익어가는 그 꽃은 내 눈동자 안에서 불꽃을 봤다. 어쩌면 악마의 열탕(熱湯)보다 더 뜨거운 내 야망을 봤다. 연하의 남성이 연상의 여성에게 호감 이상의 감정을 줄 수 있는 방법은 그리 많지 않다. 젊음과 지성. 나는 젊었고, 그녀와 통할만한 지성을 갖추고 있었다. 그리고 야망. 야망이라 함은 그 일이 실제로 이뤄질 수 있다는 데 대해 스스로 두려움을 느낄 만큼의 큰 야망이어야 한다. 그녀는 나에게서 그 모든 성향을 볼 수 있는 통찰을 품은 사람이었다. 그녀는 나를 시험하기 위해 끊임없이 건드렸고 도발했다. 하지만 나는 늘 우등생이었다. 어느 날 그녀는 내게 손을 건넸다. 나는 그 뜻을 알고 있었다. 내 양손은 그녀의 한 손을 감싸안았다. 그때부터 그녀는 나를 더 이상 시험하지 않았다.




   주피터는 지혜의 여신 메티스를 자기 머릿속에 넣고 다녔다고 한다. 결정적 순간이 올 때마다 조언을 듣기 위해서다. 그때부터 나의 메티스는 플로티나였다. 불 같을 때는 어린 헤라클레스를 보는 유노 같았으며, 얼음 같을 때는 밤 호수에 비친 다이애나 같았다. 그녀는 그만큼 내게 서스럼없이 조언했고, 옳은 길을 인도했다. 트라야누스 황제는 나와 그녀의 관계를 알았을까. 그러지 않았으리라고 본다. 지성으로 맺어진 우리의 사랑은, 누군가가 눈치 채기에는 너무나도 고결했다. 


   그녀는 늘 아름다웠다. 황제와 나란히 옆에 설 때는 파리스의 사과*를 한껏 쥘 수 있을 만큼의 기품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녀는 나를 볼 수 있는 자리에선 애써 아름다워보이려고 하지 않았다. 화장기도 없고, 화려한 치장도 없는 상태였다. 나에게 그런 것 따위는 상관 없었다. 되레 화장기가 없는 얼굴로 무언가를 생각할 때, 코 끝을 찡그리며 얇은 손가락을 입술에 대는 모습을 보이는 건 나만이 감지할 수 있는 영광이었다. 


   어쩌면 플로티나는 내게 사랑 그 이상의 존재였다. 우리는 몇 번씩 근위병의 눈을 피해 따로 만난 적이 있다. 하지만, 우리 둘 중 누구도 이를 밀회(密會)로 여기지 않았다. 우리는 그저 서로의 생각을 주고 받는 토론의 시간으로만 활용했을 뿐이었다. 우리 둘만 있는 그 방에는 사랑보다도 더 짙은 지성과 동경, 호기심만 떠다닐 뿐이었다.



구스타프 클림트, 꽃이 있는 농장 정원

   신의 뜻을 누구도 거역할 수 없듯, 그녀의 죽음도 예고된 수순이었다. 사신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그녀가 어느 날 아무렇지도 않은 듯 수줍게 웃으며 왕실에 발을 딛었을 때, 원로원들은 건강 회복을 축하하는 박수를 보냈었다. 


   나만이 박수를 칠 수 없었다. 그녀에게서 코르시카 섬 안 도끼 자국이 찍힌 나무들을 봤기 때문이었다.


   코르시카 섬의 나무꾼은 자신이 곧 베야 할 나무에 미리 도끼 자국을 찍는다. 이는 사신의 흔적인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그녀가 갑작스레 죽었을 때도 놀라지 않은 단 한 명의 로마 시민이 될 수 있었다. 그렇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정말로 아무렇지도 않았다. 나와 그녀는 여전히 보이지 않는 지성의 끈으로 이어지고 있다. 플로티나는 죽었다. 그래도 나는 내 머릿속에서 언제든 그녀를 볼 수 있다. 대문 손잡이가 헐고, 문지방이 닳아없어질 때까지 찾아갈 수 있다.


   로마 시민은 죽은 이를 추모할 때 많은 공양품을 내놓지 않는다.


   위대한 신의 은혜를 믿는 일부 가문은, 자신이 공양하는 물건 하나가 무지개 다리를 건너서는 100배가 돼 전해진다고 믿고 있다. 포도 한 송이를 내놓아도 저 세상에 있는 이는 달짝지근한 포도 100송이에 몸을 뉘일 수 있는 것이다. 추모할 이가 있을 때는 꽃 몇 송이만 정성스럽게 놓으라고. 죽은 이는 저 세상에서도 그리운 그대 향기가 스며든 백 송이의 꽃에 가득 잠길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왕관을 쓴 나는 그녀의 묘 앞에 철쭉과 영산홍이 섞인 야생화 몇 송이를 올려둔다. 


   한 장면이 떠오른다. 나는 나무 장작이 가득 쌓인 재단 위, 매캐한 화염 속 죽어가는 노인을 바라본 적이 있다. 그는 마치 자기 안방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가장 행복했던 한 때, 가장 좋아했던 시 구절을 떠올리는 것처럼 평온하게 타올랐다. 나무 타는 냄새 틈 속에서 비릿한 기름 냄새가 섞여왔다. 죽을 때까지 평정심을 잃지 않던 그 노인은 호라티우스**였다. "왜 웃느냐. 이름만 바꾸면 바로 너의 이야기인 것을(Quid rides? Mutato nomine, de te fabula narratur)…." 나는 이를 구경하는 로마 시민들 틈에서 노인의 익히 알려진 시 구절을 떠올렸다. 노인은 신의 미움을 산 최후를 맞고 있다. 내가 만일 그와 같은 처지가 돼 불 속에 갇힌다면 평정심을 붙잡을 수 있을까. 그럴 수 있다.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나는 로마의 황제였다. 로마를 위해서라면 그 어떤 모멸도 견뎌내야 했다. 그 어떤 고통도 이겨내야 할 위치였다. 내가 호타리우스의 최후를 볼 수 있었던 건 순전한 신의 뜻이었다. 나는 그 장면을 보고, 곧 플로티나를 떠올렸다. 나는 이제야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었다.




   나는 그날 밤 꿈에서 깨어났을 때 짐승처럼 울어야 했다. 그 소리를 참기 위해 입을 막으니 목에서 쇳소리가 끓어나왔다.


   나는 꿈 속에서 또 플로티나를 봤다. 금빛의 그림자 속 철쭉과 영산홍, 갖은 야생화가 가득한 산자락이었다.


   진실로 이 세상 모든 것 중 결코 용납할 수 없는 게 있다면 그녀가 꿈에서도, 이 향긋한 꽃 향기가 넘실대는 들판 위에서도 여전히 죽어있다는 것이다. 나는 매일 밤 그녀를 만났지만 그녀는 단 한 번도 일어나지 못했다. 


   고백한다. 나는 언젠가는 눈을 뜨고 있는, 등을 꼿꼿히 세운 채 코 끝을 찡그리고 있는, 옅은 눈물 자국 속에서도 은은한 미소를 짓고 있는, 모르는 척 결국 황제가 돼버리고 말았느냔 말을 툭 건넬 줄 아는, 그런 모습을 볼 수 있을까 싶어 그녀를 내 꿈에 오랫동안 붙잡아뒀다.     


   맨발의 나는 그녀에게 다가가기 전 눈을 질끈 감았다. 내도 모르는 새 눈물이 양볼을 타고 있었다. 그녀의 발끝에 갖은 야생화를 걸어준다. 라일락 꽃인지 모를 향이 난다. 화려한 외양 속 강인함을 품고 있던 그녀에게 가장 어울리는 꽃무리다. 


   그녀는 식어있다. 은은한 서풍(西風) 탓이라고 생각하자. 그녀의 표정은 고요하고 관절은 늘어졌다. 곤히 잠든 탓이라고 생각하자. 나는 얄팍한 그녀의 팔을 들어 내 목 위로 끌어올린다. 그녀의 양다리를 절벽 낭떠러지에 걸쳐놓았다. 내가 놓아둔 수백 송이 꽃이 흔들거린다.


   나는 그녀의 죽은 고개를 돌려 입을 맞춘다. 


   이승에서 하지 못한, 처음이자 마지막 키스를 한다. 사랑과 동경, 존경과 고마움, 감사와 그리움, 그리고 이별의 뜻이었다. 시간이 멈춘다. 오직 아스라한 바람만이 목덜미를 간질일 뿐이다. 순간, 그녀의 볼과 가슴골 사이에서 맡아본 적 없는 이국적인 꽃 향기가 느껴진다.


   이게 마지막이었다.


   나는 로마제국의 황제였다.


   플로티나가 내 앞에 다가설 수 없다면, 더는 지혜의 목소리로 내 가슴을 울릴 일 없이 그저 꿈 속에서 내 생명을 갉아먹을 뿐이라면, 그녀 또한 나에게선 통치를 위해 쏟아야 할 귀한 시간을 뺏는, 제국의 방해물에 불과했다.


   나는 그녀를 밀어내야 했다. 


   황제의 길은 앞으로 더 고독해질 것이다. 열심히 일할수록 깊이 상처받고 훼손 당할 것이다. 나는 곧 이런 내 행동을 후회하며 그녀가 어떤 모습이든, 그저 내 꿈에 나타나기만을 기다리는 처지가 될 수 있었다. 사람은 유혹을 이길 수 없다. 그러니까 그 여지를 없애버려야 한다. 그 순간에 수백번, 수천번 되내인다. 나는 하나의 사람이 아닌, 제국의 황제였다. 세상 모든 곳이 멸망한 후에도 최후의 도시가 될 로마의 지도자였다. 사사로운 감정은 사치일 뿐이다. 그녀를 놓아줘야 한다. 당장 이 꿈에서 깨고부터 후회하겠지만. 


   나는 비좁은 플로티나의 어깨를 양손으로 잡고, 살며시 낭떠러지 쪽으로 힘을 준다.


   한 때는 그녀가 벌린 두 팔이 내가 아는 수평선의 전부였다. 그런 그녀가 이젠 내 손으로 절벽에서 떨어진다. 바다의 금빛 수평선 안으로 서서히 잠기고 만다.


구스타프 클림트, 키스




   금가루가 뿌려진 하늘, 꽃이 만발한 들판, 부둥켜 안고 있는 한 쌍의 연인. 네모 무늬의 금색 도포를 걸친 남성이 몸을 숙여 여성을 으스러질듯 껴안고 키스를 하려고 합니다. 동그라미 무늬의 무릎 꿇은 여성은 가녀린 몸을 온전히 맡긴 채 눈을 감고 고개를 젖히며 이를 기다립니다. 


   고대 로마 제국의 오현제(五賢帝·5명의 현명한 황제) 중 한 사람인 하드리아누스 황제(재위 117~138)가 구스타프 클림트(1862~1918)의 키스(1907)를 마주하면 어떤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그의 조력자인 플로티나 왕비를 생각하지 않았을까. 종종 이런 상상을 하곤 합니다.



 

  오스트리아에서 금 세공사의 아들로 태어난 클림트는 타고난 예술가였습니다. 뭐든 이 정도는 그려야 직성이 풀리는 그런 인사였죠.


   이 그림에서 남성은 클림트 본인, 상대 여성은 클림트가 뇌출혈로 눈 감을 때까지 곁을 지킨 에밀리 플뢰게(Emilie Floge)라는 설이 유력합니다. 두 사람은 서로 사랑의 감정을 느꼈지만, 끝내 결혼하지 않고 오직 정신적 사랑으로 27년간 연인이자 친구로 함께 생을 걷습니다. 


   클림트의 생활은 늘 난잡했습니다. 숱한 그림 모델들이 먹잇감이었죠. 에밀리만이 다른 여성과는 달리 작업을 허락하지 않았고, 클림트는 되레 이 때문에 매력을 느꼈다고 합니다. 클림트의 외도로 인해 모호한 연인이던 두 사람의 관계는 파탄을 맞습니다. 클림트는 에밀리가 떠난 2년간 한 그림에 몰두하는데, 이 그림이 키스였다고 전해집니다. 그가 그녀에게 이 그림을 선물하고 난 후에야 사이가 회복됐다네요. 에밀리는 클림트가 58세로 세상을 떠날 때 유일하게 곁을 지킵니다.


   클림트 필생의 역작인 덕일까요.


   오스트리아 빈 국제공항에는 이런 문구가 쓰여있다는 데요. "클림트의 '키스'를 보지 못했다면 빈을 떠나지 말라"고요.



*파리스의 사과 : 불화(不和)의 여신 에리스가 올림포스의 신들을 분열시킨 음모의 사과. 당시 목동 생활을 한 파리스는 이들의 논쟁에 휘말려 결혼의 수호신 헤라, 전쟁과 지혜의 수호신 아테네, 아름다움의 수호신 아프로디테 중 사과의 주인으로 아프로디테를 지목한다. 아프로디테는 그 보답으로 파리스에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 헬레네를 안겨주지만, 이 일은 이후 트로이 전쟁의 단초가 되고 만다.


**호라티우스 : B.C. 65~8. 로마의 서정·풍자 시인. B.C. 44년 브루투스(M.J. Brutus)를 따라 종군, 패배한 후 부친 재산이 몰수돼 생활 궁핍으로 시를 쓰기 시작. 풍자시와 서정시로 명성을 얻었다. 로마 서정시의 완성자로 《서정시집 Odae》 4권은 그의 서정시의 최고를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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