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24도 ‘사랑의 강’ 따라 역사가 흐르는 곳
▲ 대만 최대 항구도시 가오슝의 가오슝항과 85빌딩(가운데).
“개(狗)를 때리다(打)!”
“아니! 감히? 누굴 때려?!”
견공(犬公)을 두고서 ‘반려견’ 대신 ‘애완견’이란 표현을 쓰면 ‘교양 없다’는 소리 듣기 좋은 세상이다. 와중에 견공을 때린다고?
‘개를 때리다’라는 뜻의 다거우(打狗)는 대만 가오슝(高雄)의 옛 이름이다. 과거 대만 남부 가오슝과 핑둥(屛東) 일대는 대만 원주민 중 마카타오(Makatao·馬卡道)족 터전이었다. 마카타오족은 대나무가 우거진 이곳을 ‘타카우(takau·대나무숲)’라 불렀다. 한족들은 ‘다거우(打狗·타구)’로 음차표기 했다. 1895년부터 대만섬을 식민통치한 일제는 ‘takau’의 일본어 훈독(訓讀) ‘Taka-o’를 같은 음의 ‘고웅(高雄)’이라 바꿔 부르기 시작했다. 1945년 대만 광복 후 중화민국(대만) 정부도 지명을 살려 쓰기로 하여 베이징 표준어 발음대로 ‘가오슝’이라 부르게 되었다.
가오슝은 대만의 제1 항구도시다. 전성기 가오슝항은 컨테이너 처리량 기준 세계 3위 무역항에 오르기도 했다. 무역항으로서 위상은 하락세지만 남(南) 대만의 관문 역할은 변함없다. 대만 전체 수출입량의 절반 이상이 가오슝항을 거친다.
대만 근현대사의 축쇄판
2017년 12월 혹한이 몰아치던 날 필자는 가오슝으로 피한(避寒)여행을 떠났다. 3시간 비행 끝에 가오슝 샤오강(小港)공항에 내렸다. 입국 심사장에 들어서자 불과 몇 시간 전 한기를 막기엔 얇게 느껴졌던 트렌치코트가 거추장스러웠다. 온도계를 바라보니 섭씨 20도를 가리키고 있었다. ‘늘 여름인 나라’라는 뜻의 상하국(常夏國) 대만에서도 가오슝의 기후는 연중 온화하다. 연평균기온 24.19도, 기온이 가장 낮은 1월도 평균 19.1도를 기록한다. 몬순기후대에 자리한 가오슝의 겨울은 건조하다. 연평균 144.83㎜, 8월엔 평균 436㎜의 강수량을 기록하는 곳이지만 12월 평균 강수량은 10㎜에 그친다.
가오슝의 역사는 대만 근현대사와 궤를 같이한다. 시내 곳곳에는 다사다난했던 지난날을 무언의 함성으로 말해주는 역사 유적들이 남아 있다. 제2차 아편전쟁에서 패한 청(淸)나라는 1858년 영국과 톈진(天津)조약을 체결했다. 조약에서 영국은 대만 내 항구 중 안핑(安平)으로 불리던 타이난(臺南)·단수이(淡水)·지룽(基隆)과 더불어 가오슝의 개항을 요구했다. 6년 후 가오슝은 공식 개항했다. 영국은 요충지 가오슝에 스윈호(Robert Swinhoe)를 영사로 파견했다. 1879년 다거우 영사관이 공식 개관했다. 산상(山上)의 영사관, 산하의 영사관저 2동으로 이루어진 영국영사관은 북부 단수이의 홍모성(紅毛城)과 더불어 ‘근대 대만’을 대표하는 유적이다. 영사관과 관저 내부는 ‘대영제국’ 외교관의 호사스러운 생활상을 재현해 두었다.
시쯔완(西子灣) 영국영사관 입구에 면한 선착장에서는 문화관광여객선을 탈 수 있다. 약 50분 동안 가오슝 내항(內港)을 도는 유람선에는 문화관광해설사가 동승해 가오슝항의 풍경 설명과 더불어 역사해설을 해준다. 치진(旗津)·구산(鼓山)·옌청(鹽埕) 등 6개구(區)에 걸쳐 있는 가오슝항은 항도(港都)의 정취가 가득하다. 유람선상에서 85층 높이의 ‘85빌딩’도 눈에 담을 수 있다. 가오슝의 ‘높을 고(高)’ 자를 형상화한 85빌딩은 높이 348m인 가오슝의 랜드마크다. 빌딩 안에는 가오슝항을 내려다볼 수 있는 전망대와 함께 5성급 고급호텔이 자리 잡고 있다.
시쯔완에 자리한 구산(鼓山) 페리선착장에서 10분 간격으로 출항하는 페리를 타고 건너가면 도착하는 ‘치진’은 일종의 인공섬이다. 본래 남쪽 끝이 육지와 연결되어 있는 반도였다. 1975년 선박의 가오슝항 출입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수로인 과항수도(過港隧道)를 건설하면서 분리됐다. 치진은 가오슝항의 역사가 시작된 곳이다. 명(明) 말 청(淸) 초부터 중국 본토와 대만을 잇는 선박들의 주요 기항지가 되었다. 개항기에는 이곳을 거쳐 벽안(碧眼)의 이방인들이 대만에 발을 디뎠다.
면적 1.4639㎢의 작은 섬 치진은 볼거리·먹을거리만큼은 풍부하다. 페리 선착장에 내리면 해산물 거리가 펼쳐진다. 거리 곳곳의 해산물 가게에는 갓 잡아올린 생선, 해산물들이 매대마다 가득하다. 부산의 자갈치시장처럼 직접 고른 것을 즉석에서 요리해주는 방식이다. 산지(産地)이다 보니 가격도 저렴하다. 각종 군것질거리를 파는 노점도 여행객들의 눈과 입을 즐겁게 한다.
▲ (좌) 아이허의 야경. (우) 보얼예술특구.
도시재생 모범 보얼예술특구
해산물 거리 중간에는 천후궁(天后宮)이 있다. ‘바다의 여신’ 마조(媽祖)를 모신 사당이다. 1673년 창건된 이래 인근 어부들의 안녕과 풍어(豐漁)를 기원하는 곳이다. 인파를 따라 치진로(路) 끝으로 가면 모래사장이 펼쳐진다. 치진풍차공원, 이름 그대로 7개의 발전용 풍차가 서 있는 해변공원이다. 해변에 서면 사람을 삼킬 듯한 집채만 한 파도가 넘실댄다. 공원에서 발품을 팔아 30분쯤 걸으면 산 중턱에 가오슝등대가 나타난다. 1883년 세워진 바로크양식 등대로 100년 넘는 세월 동안 뱃사람들의 길잡이가 되어오고 있다.
지하철에 해당하는 제윈(捷運·MRT)은 빨간색과 오렌지색 2개 노선으로 운영 중이다. 그중 오렌지색 노선 북쪽 끝 역은 시쯔완역이다. 이곳의 옛 이름은 하마싱(哈瑪星), 일제강점기 때 건설된 신항만이다. 1900년 11월 문을 연 가오슝의 첫 기차역 가오슝항역도 자리하고 있다. 2008년 이후 더 이상 철마(鐵馬)가 달리지 않는 역은 ‘다거우철도이야기관(打狗鐵道故事館)’으로 꾸며져 관람객을 맞이하고 있다. 폐선된 가오슝 항만철로는 일제강점기 때 가설 후 한 세기 동안 바다와 대만섬을 잇는 동맥으로서 충실히 기능했다. 가오슝항역에는 38본(本)의 철로가 그대로 남아 지난날 역의 번성을 짐작게 한다.
시쯔완역에서 해변을 따라 걸어오면 가오슝항 제2부두다. 가오슝의 전성기 흥성했던 이곳은 가오슝의 성장세가 꺾이면서 활력을 잃었다. 항구 인근 물류창고들도 방치되어 이내 흉물이 되었다. 2000년대 가오슝시 당국은 방치된 물류창고를 문화·예술창작지구로 재탄생시켰다. 오늘날 보얼예술특구(駁二藝術特區·The Pier-2 Art Center)다. 연간 400만명 이상이 발걸음하는 도시재생사업의 모범 사례로 꼽히는 곳이다.
세월의 흔적이 묻어나는 갈라지고 칠 벗겨진 옛 물류창고 25동에서 예술가들은 창작 혼을 불태우고 있다. 특구 곳곳에는 실험정신 넘치는 예술작품들이 가득하다. 그중 어부와 공인(工人) 조각상은 보얼예술특구의 상징, 항구도시이자 공업도시 가오슝의 정체성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보얼예술특구에서는 가오슝디자인페스티벌, 캐릭터페스티벌 등 연간 20회 이상 개성 넘치는 전시회·축제가 개최된다.
‘사랑의 강’이라는 뜻의 아이허(愛河)는 가오슝을 가로지르는 운하다. 아이허는 지난날 수운(水運)용으로 건설되었다. 런우(仁武)구에서 시작하여 가오슝의 옛 시가지를 가로질러 바다로 이어진다. 다거우천(川)·가오슝천으로 불리다 1950년대 국민당 기관지 중앙(中央)일보가 ‘아이허’라는 이름으로 보도하면서 공식 명칭으로 굳어졌다. 아이허는 이름 그대로 연인들을 위한 강이다. 강변 산책로에는 데이트를 즐기는 이들로 가득하다. 에메랄드빛 강을 가로지르는 유람선에는 사랑을 속삭이는 연인들로 가득하다. 베네치아의 그것을 옮겨놓은 듯한 곤돌라를 타면 곤돌리에레가 세레나데를 선사한다.
사랑의 강(아이허)과 평화로운 바다(태평양)가 만나는 어귀의 지명은 전아이마터우(眞愛碼頭), ‘진실한 사랑의 부두’다. 이곳에는 2000년 전 인류에 아가페를 몸소 시현한 이를 기리는 곳이 있다. 장미성모성당(玫瑰聖母聖殿主教座堂)이다. 필리핀에서 사역하던 도미니크회 소속 스페인 신부 세인즈(Fernando Sainz)가 세운 대만 첫 천주교회다. 가오슝 개항 이듬해인 1859년 축성(築城) 이래 150년 넘는 유서(由緖)를 간직하고 있다. 고딕양식과 로마네스크양식이 어우러진 성당건축은 미적 가치가 있다. 장미성모성당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인물은 고(故) 산궈시(單國璽) 신부다. 산궈시 신부는 대만 민주화운동사에도 족적을 남긴 인물로 1998년 2월 중국계 최초로 추기경에 서임되었다. 산궈시는 1991년 3월 가오슝 교구장으로 착좌, 2012년 선종 때까지 이곳에서 하느님의 사명을 다했다.
가오슝의 별칭은 ‘대만 민주화운동의 거울’이다. 이름 그대로 대만 민주화운동사에 있어 가오슝은 중요한 역할을 해온 도시다. 1979년 12월 가오슝에서 발생한 메이리다오(美麗島) 사건은 대만 민주화운동의 모멘텀이 됐다. ‘메이리다오잡지’가 중심이 된 당시 최대 시국사건으로 주모자 스밍더(施明德) 등 8명에게 국가반역죄로 징역 12년에서 최고 무기징역이 선고됐다.
▲ (좌) 롄츠탄의 용호탑. (우) 옛 영국영사관.
대만 민주화운동의 거울
당시 시국 변호인단이 꾸려졌는데, 모두 1986년 최초 야당 민주진보당(민진당)의 창당 멤버가 되었다. 변호를 맡았던 천수이볜(陳水扁)과 주모자이던 뤼슈롄(呂秀蓮)은 러닝메이트로 2000년 총통·부총통에 당선돼 정권교체에 성공하면서 첫 민진당 정부 시대를 열었다. 2006년 이래 가오슝 시정을 이끌고 있는 천쥐(陳菊) 현 시장도 당시 12년형을 선고받았다. 아이허 강변의 메이리다오평화공원, 가오슝 제윈의 유일한 환승역인 메이리다오역이 당시 ‘메이리다오 사건’을 기념하고 있다.
타이베이에서 고속철(HSR)을 이용하여 가오슝에 도착하려면 쭤잉역을 거쳐야 한다. ‘좌영(左營)’이라는 지명에서 알 수 있듯 군 주둔지가 있던 곳이다. ‘대만의 아버지’ 정성공(鄭成功)의 정씨왕조 시절, 가오슝에는 전(前)·후(後)·좌(左)·우(右)·중(中) 5개 진(鎭)이 있었다. 그중 좌진이 있던 곳에서 ‘쭤잉’이란 지명이 유래했다. 청나라 강희(康熙)제 시절인 1722년 방어를 위해 쌓은 쭤잉성도 남아 있다.
쭤잉 지역에 갔다면 빠트릴 수 없는 곳은 롄츠탄(蓮池潭)이다. 1686년 이곳을 관할하던 펑산(鳳山)의 지방관 양방성(楊芳聲)이 근처에 공자를 기리는 문묘(文廟)를 건설하고, 문묘 옆에 반지(泮池)라는 연못을 조성한 것에서 유래하였다. 반지에서는 연꽃이 만개하여 ‘연지(蓮池)’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이후 수차례 공사를 거쳐 롄츠탄은 면적 42㏊의 거대 인공호수로 거듭나 인근에 생활용수와 농수를 공급하였다.
롄츠탄 경내에는 가오슝 공묘, 쭤잉천부궁(天府宮) 등 20여개의 크고 작은 사원이 있다. 가오슝 공묘는 대만 최대 규모로 베이징 자금성 양식의 건축물이다. 사원들과 더불어 롄츠탄의 상징은 봄과 가을을 상징하는 춘추각(春秋閣)과 용호탑(龍虎塔)이다. 쌍둥이 전각 앞에 커다란 용과 호랑이 상이 입을 벌리고 서 있는 가오슝의 상징 중 하나다. 용의 입으로 들어가 호랑이 입으로 나오면 액운은 피하고 행운을 가져온다고 전한다.
남국(南國)의 풍광과 더불어 가오슝이 가지는 매력은 여유로움이다. 한국보다 한 템포 느린 삶의 리듬에 몸을 맡기면 각박했던 삶 속에서 지친 몸과 마음이 회복되는 느낌이 든다. 친절한 사람들, 저렴한 물가도 빠트릴 수 없는 매력 요소다.
피한(避寒) 여행지로 최적인 가오슝까지 비행거리는 불과 3시간. 인천~가오슝 구간에 제주항공·티웨이항공을 비롯해 대만중화항공·에바항공 등이 취항하고 있다. 부산 김해공항에서 출발하면 에어부산도 이용 가능하다. 여유 있는 일정이라면 대만 고속철 2~3일 프리패스 구매도 고려할 만한다. 5만~7만원의 가격으로 고속철을 무한 이용할 수 있다. 타이베이에 도착하여 가오슝을 빠르고 저렴하게 다녀오고자 하는 여행객들에게 권한다.
<주간조선> 249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