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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끼 Jan 06. 2022

증자, 대학/ 자사, 중용

鞠躬盡力 死而後已

 사서삼경이라 하면 대학, 논어, 맹자, 중용, 시경, 서경, 주역이다. 듣기로 중국에서는 십삼경, 오경박사이라는 용어를 봤을 때 그렇게 부르지 않는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과거시험 과목을 묶어 부르는 게 습관화되어서 그렇다고 하는데, 사서를 정립한 것이 주희이고 조선시대 과거는 당연히 주자학 위주였으므로 일견 타당해 보이기도 하다. '논어'는 고등학교 시절 독서시간이 따로 있었는데 그 당시에 읽어본 기억이 난다. '맹자'는 예과 1학년 시절 과목이어서 달달 외웠던 기억도 나는데, 막상 지금 기억나는 것은 양혜왕 밖에 없으니 웃픈 일이다. '대학'은 제왕학 도서로 특히 '대학연의'가 대중적으로 많이 알려져 있다. '대학'의 親民을 주희가 新民으로 고쳤는데, 그에 대한 논설이 비문학 지문으로 모의고사였던가 수능 기출이었던가, 아무튼 출제되었던 기억이 난다. 사실 사서가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이야기 같아도 그 문장들 중 지금도 사용하는 문장들이 무척 많다. 읽어보면 익숙한 문장들이 많이 보일 것이다. 


사실 '대학'까지 읽을 생각은 없었다. 다만 '중용'이 과거에서 제일 어려운 과목으로 쳐줬다길래 호승심에 한 번 읽어보려 했는데, '중용'을 따로 팔지 않고 '대학'과 묶어서 팔기에 그냥 구매했다. 사서는 읽는 순서가 있다. 주희가 말하길, "사람은 먼저 대학을 읽어서 그 규모를 정하고, 다음에 논어를 읽어서 그 근본을 세우며, 다음에 맹자를 읽어서 그 드러내고 뛰어넘는 바를 관찰하고, 다음에 중용을 읽어서 옛사람의 미묘한 부분을 구하라" 이 대학-논어-맹자-중용 순서는 철칙처럼 내려와 율곡도 '격몽요결'에서 이 순서로 사서를 읽을 것을 권했다. 첨언하자면 '대학'과 '중용'은 원래 '예기'의 편인 것을 주자가 편집한 것으로 '논어'와 '맹자'에 비해 양이 적다. 생각보다 적어서 후루룩 읽을 수 있다. 물론 후루룩 읽게 되면 남는 것은 얼마 없는 거 같다. 


性에 관한 '중용' 첫 구절이 익숙했는데, 사상의학 서론 시간에 본 기억이 나서 반갑기도 했다. 동양에서는 '술이부작'이라는 철칙 아닌 철칙이 있기 때문에 '대학'과 '중용'도 모두 인용이 몹시 많다. '시경'을 제일 많이 인용하고 '논어'에 나오는 공자 말씀도 많이 인용한다. '대학'과 '중용'에서 공통적으로 홀로 있음을 삼가라고 한다. '愼獨'이라는 용어로 표현되는데 이게 정말로 한시도 혼자 있지 않는 슈퍼 인싸가 되라는 말은 물론 아니고 사람이 혼자 있으면 풀어지고 천성을 거스르는 악한 마음이 발하니 혼자 있어도 하늘이 보고 있음을 기억하고 삼가라는 뜻이 아닌가 싶다. 


주석에도 반가운 이름들이 많이 등장한다. 주희를 비롯하여 정약용도 단골로 등장하고, 송시열도 간혹 등장한다. '대학'은 치국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하고 본래 읽을 요량도 아니었으니 '중용' 이야기를 좀 더 해보려고 한다.  '중용'을 읽고 나서 두 가지가 머리에 남는데, 性과 誠이다. 유가에서는 사람이 본디 받은 천성이 선하다고 본다. 다만 둘째 마음, 惡을 파훼해보면 버금 아와 마음 심이 합쳐진 글자이다. 즉 우리 원래 마음은 선하지만 그것이 제대로 발현되지 않고 나타나는 둘째 마음이 惡 그 자체라는 의미이다. 나는 악이 발하지 않고 천성을 보존하기 위한 방법으로 誠, 성실을 제시했다고 생각한다. 물론 '중용'의 이치는 이보다 더 깊고 내가 상당히 비약한 것을 알아주길 바란다. '성실' 오랜만에 들어보는 말이기도 했다. 학창 시절에는 내가 내세울 수 있는 유일한 장점이었다. 온몸과 온 마음을 다해 성실하려 했지만, 언제부터인가 '성실'을 잊고 산 거 같다. 오랜만에 '성실'이라는 옛 친구를 만난 것으로 만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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