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날의 장미는 이제 그 이름뿐, 우리에게 남은 것은 그 덧없는 이름뿐
에코의 '장미의 이름'을 읽게 된 계기는 우연에 의해서이다. 읽고자 하는 책 후보에도 없던 책인데, '장미의 이름'에 관한 광신적인 추천에 힘입어 이 책을 사서 읽게 되었다. '장미의 이름'의 기본적인 형태는 수도원에서 일어난 연쇄살인 사건을 수사하는 이야기이다. 초반부 윌리엄 수도사가 그의 추리력을 뽐내는 장면은 '셜록홈즈'를 떠올리게 했고, 에코가 중세기의 추리소설의 원형을 투입시킨 것은 기호학자로서 그의 의도가 강하게 반영되었다고 생각한다. 소설이 진행되면서 윌리엄은 셜록 홈즈의 면모뿐만 아니라 제임스 본드의 면모도 보인다. 나에게 있어서는 금상첨화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이 책을 중세기로 간 셜록홈즈의 추리 쇼로 말하는 것은 너무나 평가절하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추리소설은 그 형태일 뿐, 이 책의 본질은 역사, 신학, 철학을 넘어 진리까지 내보이고 있다.
소설의 초반부에서 나는 살해 방식을 밝혀내고 말았다. 내가 추리해낸 것은 아니고, 오래전 책 페이지 끝에다가 독을 발라서, 페이지를 넘기고 침을 바르는 행동을 반복하게 되면 독살당하는 살해 방식이 나오는 소설이 있다는 것을 들었고, '장미의 이름'의 초반부에서 이 책이 그 책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추리소설에서는 본래 살해 방식이 클라이맥스라 이것을 진작에 밝혀낸 나의 통찰력에 짐짓 유감을 표했으나, 결론적으로 살해 방식을 알고 읽어도 충분히 재밌게 읽을 수 있었다.
'장미의 이름'은 악명 높은 에코의 책답게 상당한 배경지식을 요구한다. 중세 역사, 교황과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대립, 가톨릭 교리 등 14세기의 대략적인 시대 배경을 모르고 읽기에는 놓치는 부분이 많을 것이다. 나도 중세 역사와 신학에 일가견이 있다고 생각하였는데 이 책은 중세기 무수한 이단들의 교리까지 나오는 수준이었다. 흡사 '로마제국 쇠망사'에서 초기 기독교 이단들을 열거하는 것을 읽는 데자뷔를 느꼈다. 그래서 처음에는 윌리엄과 아드소가 그러했듯 어두운 장서관에서 길을 찾은 기분이 들었는데, 뒤로 갈수록 명쾌해진다. 아마 이것도 작가가 의도한 바가 아니었나 싶다. 심지어 다 읽고 나서는, 아마 이 책을 제대로 읽은 사람들은 다 느끼는 바였겠지만, '나 정도의 지적능력과 지식수준이 아니었다면 이 책을 못 읽겠구나'라는 생각이 자연히 든다. 그 생각은 지적 우월감과 허영을 마음껏 채워주니 혹시 지적 우월감과 허영심을 채우고 싶은 사람이라면 이 책을 통해 강력하나 쾌락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장미의 이름'은 에코가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쓴 것이 아니냐라는 찬사를 들을 정도로 아귀가 딱딱 들어맞는다. 웃음의 관한 논쟁을 초반부에 넣고, 중반부에는 청빈에 관한 논쟁, 그리고 마지막에는 다시 웃음에 관한 논쟁으로 귀결되는 서사는 기가 막히다는 표현으로 부족할 지경이다. 소설에 나오는 등장인물 중 실존인물이 많다. 단순히 이름만 따온 것이 아니라 사람의 특징을 역사를 바탕으로 잘 살린 것 같다. 베르나르 기가 이단 심문관의 역할을 할 때에는 당대에 정말 그랬으리라는 생각도 들 정도였다. 시대적 배경이 중세이기 때문에 등장인물은 모두 종교적 인간들이다. 웃음에 관한 논쟁도 결국 그리스도는 웃었냐 라는 질문으로 귀결되고, 청빈에 관한 논쟁은 결국 그리스도는 청빈했냐 라는 질문으로 귀결된다. 전자는 수도사들 사이의 논쟁에서 그치지만 후자는 당대 빅이슈였기 때문에 교황 측과 황제 측으로 나뉘어 정치적으로 이전투구를 벌이는 모습은 웃음을 자아낸다.
이 소설의 클라이맥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희극론이다. 현존하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비극론이고 아마 희극론도 있었으리라 추측하는데, 여기서 그 희극론이 나온다. 내가 작가의 의도를 충실히 따라가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최종적으로 겨우?라는 감상이 들었다. 호르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희극론만 없으면 기독교 세계가 유지될 것이고, 아리스토텔레스의 희극론이 세상으로 나가면 기독교 세계가 파괴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얼마나 우스운 생각인가, 겨우 책 한 권으로 세계가 유지되거나 파괴되다니 말이다. 윌리엄은 호르헤에게서 적그리스도의 얼굴을 보았다고 말한다. 적그리스도란 의심 없는 믿음이라고 말한다.
소설의 후반부는 무척 흥미로워 밤새 책을 놓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다 읽고 나서 든 경이로움, 지적 쾌감은 대단했으며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책일 거 같다. 세상사 우스꽝스럽지 않은 것이 어디 있을까? 짐짓 근엄한 척 하지만 웃음 한바탕이면 다 무너질 것들이다. 인자가 한바탕 웃음으로 그것들을 다 허물어버리고 웃음으로 다시 지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