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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진욱 Jul 12. 2023

수요일 '가정의 날' 야근하게 해주세요. pls

매주 수요일. '가정의 날'이다. 주위를 살피니 평소보다 사무실이 휑하다. 유연근무제로 조기 퇴근하여 빈자리가 많이 보인다. 사무실 스피커에서 가정의 날 조기퇴근을 알리는 방송이 흘러나온다. 알았다구요. 컴퓨터 전원 끄고, 책상정리 깔끔하게 하고 반강제적(?)으로 퇴근길에 오른다. 1시간 퇴근길. 집에 들어오니 아무도 없다. 매주 수요일이면 마주하는 낮익은  풍경이다. 아내는 교회로, 아들은 알바로, 딸은 외지에서...모두 바쁘게 살아가고 있다.


샤워하고 식탁에 앉는다. 아내가 정성스레 차려놓은 밥상을 보니 식욕이 돋아난다. 평소에 없던 육류가 있다. 보쌈이다. 한잔 생각이 난다. 냉장고를 열어보니 얼마전 여행에서 구입한 제주도 우도 막걸리가 눈에 들어온다. 빙고!글라스에 한잔 가득 채우니 무언가 부족한 밥상이 완성되는 느낌이다. 담징이 점하나로 그림을 완성했다는 염화미소는 지금과 같은 상황이었으리라. 막걸리와 보쌈 궁합이 제법이다. 밖에서 먹는 만찬보다 혼자 푸짐하게 먹는 밥이 이렇케 맛있을줄은  예전에는 정말 몰랐다ㅎㅎ. 이래서 사람들이 혼술의 재미에 빠지는구나!

뒷정리를 하고 소파에 기대어 TV를 켠다. 요즘 세상 돌아가는 것 보고 듣기 싫어 업무관련 사안 아니면 뉴스를 의도적으로 보지 않는다. 뉴스를 보면 거기에 꽃혀 개인적 의견을 페이스북에 장문의 글을 올리고 부지불식중 Redline을 넘길때도 있다. 지인이 충고하면 삭제하고, 열받으면 또 올리고..반복되는 행태에 정신건강 상태가 좋지 않음을 실감한다. 뉴스를 안보니 정신건강에는 아주 좋은 반응이 나타나고 있다.  요즘은 양평고속도로 어쩌고 저쩌고 엄청 쌈질하더구만.. 결국에는 힘센 놈이 이기겠지..


평소 즐겨보는 유튜브를 시청한다. "태군"이라는 채널이다. 40대 중반 평범한 직장인이 퇴근후 동네 맛집을 다니며 음식 먹는 모습을 보여주며 이런저런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를 하는데 은근히 빠져들게 된다. 일본의 "마츠다부장"이라는 채널과 유사한데 안꼬없는 찐빵처럼 맛은 없는데 자꾸 보게 된다. 집에서는 식사 중 절대 술을 안 마시는데 오늘 저녁은 유튜버를  따라 해보았다. 유튜브가 중년남성에 미치는 사회적 영향력을 실감할 수 있었다.


슬슬 졸음이 쏟아진다. 조용히 소파에서 취침인지 휴식인지 모를 애매한 자세로 있는데 아내가 집으로 들어온다. 밥 맛있게 먹었어? 아내의 살가운 목소리가 꿈에서 들리는 듯했다. 자기야! 밥을 왜 이렇게 많이 먹었어? 막걸리는 왜 마시고? 꿈이 아님을 실감하고 자세를 바로잡는다. 반찬이 좋아서 그만.. 얼버무리며 아내의 눈치를 살피게 된다. 자고 싶은데 지금 바로 방으로 들어가 자면 당분간 금식이라는 페널티가 주어진다는 사실을 잘 알기에  거실을 이리저리 열심히 돌아다닌다. 마치 집안 일 하는 것처럼.


기회는 이때다. 아내가 씻으러 화장실에 들어간 사이 안방으로 가서 조용히 불을 끈다. 이후의 상황은 나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 가정의 날! 그냥 회사에서 일하면 안되나요? plea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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