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왕제약 이름의 비밀
8시 오픈.
봄바람이 살랑거리며 햇살이 소복하게 모이는 아침 시간의 카페는 분주하게 출근하는 손님들이 그날의 생존형 카페인을 한 잔씩 들고 가고 나면 거짓말 같은 평화가 찾아온다.
간혹 그때부터 활기 넘치는 수다가 복작이는 경우도 있다.
카페 바로 앞에 유치원, 가까운 곳에 어린이집이 세 개나 있는 곳이라 아침에 아이들을 제시간에 등원시키기 위해 바쁘게 몸을 움직인 엄마들이 아이들을 기관에 보내고 나서 수다 코드가 맞는 엄마들끼리 시간이 맞으면 아침부터 바짝 조였던 긴장을 풀고 한숨 돌리는 시간을 위해 함께 자리를 잡기도 하기 때문이다.
특히 3월 신학기가 시작되면 긴장한 모습의 엄마들이 많이 보인다. 생애 처음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낸 엄마들이다. 아이들은 짧으면 일주일, 길면 한 달까지도 처음 엄마와 떨어져 지낼 기관과 선생님들에 대한 적응 기간을 가지게 된다. 처음엔 하루 30분에서 한 시간, 반나절의 순서로 조금씩 시간을 늘려가며 점심을 먹고, 낮잠을 자는 것까지 자연스럽게 적응할 수 있게 될 때까지 기다리기 때문에 3월 첫 주엔 한 시간 내에 아이를 데리고 가기 위해 잠깐 와서 앉아있는 엄마들이 군데군데 자리를 잡는 것이다.
그중 눈에 띄는 분들이 있었다.
창가의 원탁 의자에 마주 보고 앉은 모녀는 커피와 크림빵을 함께 먹고 있었다.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너무 닮은 옆모습이 엄마와 딸이라는 것을 한 번에 알 수 있었다. 예의를 갖출 필요 없이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자세로 의식적이지 않은 대화를 툭툭 주고받으며 웃기도 하고 서로에게 자잘한 잔소리를 늘어놓는 듯한 높고 낮은 목소리가 저 멀리서 그림처럼 반짝반짝 빛났다.
그 모습을 보고 내가 엄마와 단 둘이 카페에 앉아있던 때를 떠올렸다.
엄마는 커피를 참 좋아했다. 변변한 슈퍼도 하나 없는 시골 동네에서 당연히 그럴듯한 카페는 없었지만, 엄마는 집에서도 달달한 믹스커피 대신 맥심 오리지날 병커피에서 티스푼으로 알커피 두어 번을 푹푹 퍼내고 뜨거운 물을 부어 깔끔하게 블랙커피를 마시는 것을 즐겼다. 시골 5일장을 돌면서 새벽부터 해가 질 때까지 좌판을 깔고 새송이버섯을 손질해서 팔던 엄마는 아무리 고단한 하루를 보내고 돌아와도 그 커피 한 잔에 피로가 가신다고 말했다. 아무리 두통이 심한 날에도 커피를 마시면 약보다도 더 낫다고, 시골 아줌마지만 나는 좀 이렇게 세련된 면이 있다는 엄마 특유의 농담 끝에 뜨거운 커피 한 모금씩을 호로록거리며 소파에 기대어 앉곤 했다.
함께 병원에 다녀온 후 상주버스터미널 앞의 던킨도너츠에 나는 엄마와 함께 앉아 있었다. 그 해 1월 엄마는 말기암 진단을 받았고, 그로부터 수개월이 지난 더운 어느 여름날이었다. 아무래도 커피보다는 차가 좋겠다 싶어 엄마에겐 카모마일 티를 시켜주고, 나는 커피를 받아 앞에 놓았다. 노란빛이 맴도는 뜨끈한 카모마일티가 담긴 머그잔을 잡은 엄마의 큰 눈은 내 커피잔에 시선이 고정되어 있었다.
"엄마, 커피 마시고 싶어?"
"아니. 이거 맛있어. 구수하고."
"거짓말. 마시지도 않았으면서. 커피 마시고 싶으면 좀 마셔 엄마."
웃으며 커피잔을 엄마 쪽으로 쓱 밀었더니 정말 마셔도 되냐는 눈빛으로 한번 내 눈을 보더니 얼른 커피잔을 들고 입술을 쭉 빼며 블랙커피 한 모금을 정성껏 마셨다. 그즈음 엄마는 부쩍 마른 얼굴 때문에 아파 보이기 싫다며 외출할 땐 빨간색 립스틱을 꼼꼼하고 화사하게 바르곤 했기 때문에 머그잔에 빨간 루주 자국이 선명하게 묻어났다. 이걸 미안해서 어쩌냐며 황급히 손으로 슥슥 닦아내면서 마신 티도 나지 않는 커피가 담긴 컵을 조심스럽게 다시 내려놨다.
"맛있어?"
"응. 여기 커피 너무 맛있다? 고마워, 커피 마시니까 하나도 안 아픈 것 같네."
마주 보며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시간을 확인한 딸은 초조한 듯 마시던 잔을 먼저 반납하고 매장을 나섰고, 엄마는 한참을 앉아서 이 골목과 저쪽 골목 한쪽을 바라보며 앉아있다가 한참이 지난 후에야 일어났다. 다음에 오셨을 때 찍은 사진을 보내드리려고 이메일 주소를 여쭤보며 친정엄마 맞으시죠? 했더니
"네. 아이 어린이집 이 앞에 처음 보냈는데 적응기간이라 저는 출근을 해야 해서 엄마가 아이 데려오는 것 도와주시거든요."
라며 웃었다.
딸의 아이가 자라서 어린이집에 가고, 그 아이를 키우며 출근도 해야 하는 딸을 마주 바라보던 엄마의 마음. 딸이 바삐 떠나는 뒷모습과 딸의 아이가 있는 어린이집을 번갈아 물끄러미 바라보던 찬찬한 시선. 가지런히 모은 손이 꼭 기도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벌써 엄마가 되었지만 아직도 친정엄마 눈엔 걱정스럽기만 한 딸을 응원하고 싶은 엄마의 깊은 마음 때문이 아니었을까.
나도 가만히 손을 모으고 어디선가 엄마가 된 나를 보고 있을 우리 엄마를 그려본다.
그리고 엄마와 커피를 마시러 오는 손님들을 한참씩 바라본다.
카페의 분위기가 어떻건 딸과 함께 데이트를 하러 온 공간이 그저 좋은 엄마, 작은 잔에 크림과 함께 담긴 커피를 보며 너무 예쁘다고 감탄하는 소녀 같은 엄마, 할머니가 되었어도 멋스러운 재킷과 스카프를 매치하는 센스가 있는 엄마, 사진을 찍어준다고 하면 세상 어색하게 입이 파르르 떨리지만 조잘조잘 딸의 이야기를 들으며 크게 머금은 미소는 세상 밝고 행복한 엄마, 얼마 하지도 않는 커피값이지만 '맛있는 커피 사줘서 고마워' 애교스럽게 딸에게 인사하는 엄마.
그리고 그런 엄마들을 꼭 닮은 딸들.
상왕제약에 오는 모든 엄마와 딸의 모습을 그 여름 카페에서의 나와 엄마의 모습과 겹쳐본다.
그 좋아하는 커피를 미처 한잔 다 마시지도 못한 우리 엄마와의 카페 데이트를 나는 더 이상 함께 할 수 없게 되었지만 '마음의 병에는 커피가 약보다 낫다'는 엄마의 말로부터 비롯된 상왕제약의 [제약]이라는 이름, 그리고 [오늘의 치유를 조제합니다]라는 그 정신은 매일 상왕제약에서 계속되고 있다.
한 잔, 한 잔을 더 마음 담아 조제하려고 하는 이유다.
상왕제약이 아니더라도
많은 사람이 좋은 곳에서 맛있는 커피를 마시고 매일의 그 마음이 조금 나아졌으면 한다.
그리고 누구라도 엄마와 커피를 마시러 가는 시간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함께 커피를 마실 때의 향기와 커피의 맛과 손끝을 스치던 손등의 살결까지 모든 것이 생생하게
나의 남은 날을 열렬히 응원해 주는 행복한 한 장면으로 오래오래 남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