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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뻔히 돌 맞을 글을 쓰고 있을까.

현 세태 속에서의, 일개 정신과 의사의 내적 갈등

by 아는 정신과 의사


‘생명을 논하면서 돈 이야기를 하다니.’, ‘밥그릇 싸움에 국민의 생명을 걸다니.’와 같은, 대중의 인식에 합치되는 직관적인 논리를 재료삼아 고결한 이야기를 쓰는 것은 개인적인 이로움이 많은 일이다. 읽는 이들로 부터의 참의사라는 찬사와, 그에 따라 병원 이름을 알리거나 방문환자가 늘어나는 등 현실적인 이득을 얻을 수 있고, 작금의 상황에서 일개 의사로서 느끼는 격렬한 내적 갈등을 무마할 수도 있다. 쓰기 쉽고 읽기 좋은 그 글을 유려하게 쓰는 것이, 최소한 10년 이상의 시간이 흐른 뒤부터 년 400명 수준으로 증가할 의사 수를 걱정하는 것보다는 개인적인 영달에는 훨씬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런 글들에 비하면 지금 쓰고 있는 이런 돌 맞기 십상일 글 따위, 현실적으로 내게 도움 될 것이 하나도 없다. 이 글로 말미암아 그간 늘 부족한 글을 읽어주셨던 분들에게 전하고픈 위로를 크게 퇴색시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도 가득하다.


그러나 나는 아름다운 글 대신 써야 할 글을 쓰기로 했다. 내담자가 원하는 이야기를 해 주며 자신의 이름을 드높이거나 현실적인 이득을 취하는 것은 정신의학적 의료 윤리에 위배된다. 정신과 의사는, 때로는 반감이 예상되더라도 그들에게 필요한 이야기가 무엇일지를 함께 고민하며 내담자가 더 나은 삶을 사는 데 도움을 주고, 그 과정을 통해 스스로의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이다. 이를 되새기며 나는, 많은 이들이 원하는 이야기를 하며 찬사를 받고 싶은 ‘욕망’에 부합하는 글 대신, 돌을 맞더라도 해야 할 이야기를 회피하지 않는 나의 ‘양심’에 부끄럽지 않은 글을 쓰려 한다.


레지던트 시절 번개탄 자살 시도로 응급실에 온 환자가 있었다. 일산화탄소 중독은 뇌로 가는 산소 공급을 방해하여 돌이킬 수 없는 뇌 손상을 일으킨다. ‘고압 산소 챔버’ 라고 하는, 인위적으로 산소의 농도를 높이는 장치를 이용해 치료를 하면 이를 막을 수 있다.


고가의 챔버는 인근 지역 전체를 통틀어 단 한대만 존재했다. 그리고 그 유일한 장치는 이미, 다른 환자를 치료 중이었다. 그 환자는 결국 전원을 가지 않고 본원 신경과에서 차선의 치료를 받았다. 이후의 의료기록은 열람하지 않았다. 그러고 싶지 않았다. 치명적인 후유증이 남았을 가능성이 높다. 우리병원은, 국가에서 지정한 ‘지역 응급 의료센터’ 였다.


의료 수가는 환자가 내는 돈이 아니다. 국민이 모은 건강보험료로, 의료행위에 대한 책정된 비용을 지불하는 것이 의료수가다. 외상외과, 흉부외과, 중환자실 등의 필수 의료 영역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전문 인력과 고가의 장비가 필요한데, 현재의 수가는 소요 비용에 비해 턱없이 낮게 책정되어 있어 이로 인한 대량의 적자가 발생한다. 대형 병원은 이를 장례식장, 주차장, 식당 운영 등으로 메울 수 있지만, 지방의 중소병원은 이러한 시설을 유지할 수 없다. 심장수술을 하고 분만을 할 병원은 사라져가고, 그 자리에는 환자가 부담할 비용이 많아 수지가 맞는 의료행위를 시행하는 미용의원, 요양병원들이 들어선다.


이에 의사들은, 최소한 생명을 살리는 의료 행위에 대해서는 수가를 현실화하고, 그에 소요되는 고가의 장비와 의료 인력을 운용할 수 있도록 일곱 군데의 대형 권역 응급센터를 설치하며, 전국 각지에서 이를 향하는 헬기를 통한 이송 체계를 갖추자 끊임없이 이야기해 왔다. 그런데 정부는 그 대신 전국에, 그다지 특별한 기능을 하지 못하는 수십 개의 응급센터를 난립시켰다. 어, 이렇게 하면 안 되는데, 현장의 목소리가 너무 전달이 되지 않는다고만 생각했다. 그것이 건보료를 보전하면서 각 지역의 표심까지 함께 가져올 수 있는 묘수라는 걸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면, 설마 사람 목숨이 달린 일에 그러한 정치 논리를 적용시킬 것이라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면, 내가 너무 순진하고 바보 같은 것이었을까.


응급성, 시급성 면에서 필수과 수가 보전보다는 우선순위가 떨어지지만, 수요가 많고 비용이 비싸 유권자에게 호소력이 있는 MRI 촬영의 급여화를 시행했던 정부는, 코로나 정국에 느닷없이 공공의대 설립을 통한 의사 증원을 기습 발표했다. 이국종 교수 같은 이도 버틸 수 없는 의료 현실, 전공을 살릴 자리가 없어 이미 수없이 존재하는 외과의사 들이 미용을 배우고 흉부외과 의사들이 하지정맥류 수술병원 개원에 내몰리는 현실. 이러한 현실들을 개선해 소중한 생명들을 수없이 살릴 수도 있는 수천억, 수조원 이상의 예산 소요가 이 정책에 소요될 것으로 예상된다.


장비도 동료 보조 인력도 없이 의사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데, 그 의사가 활동할 수 있는 환경이 없으면 의사만 늘려서는 지방의료 개선, 필수과 의사 부족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데 정부가 현장의 목소리를 너무 모르나 보다, 그냥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이것저것 통계를 찾아보고, 이를 정리하여 글로 옮기기도 했다. 그런데, 그게 본질이 아니었다는 것을 점점 알게 된다.


보건복지부에서 스스로 발표한 자료를 가짜뉴스라 매도하는 현실에서 공공의대 입학 과정의 공정성 문제는 더 이상 거론하기조차 지친다. 10년의 의무복무 기간 중 인턴과 레지던트, 전임의 수련으로 소요되는 7년 이상의 시간을 제외한 나머지 기간만을 지방에서 보낼 인력, 심지어 졸업 후 서울대병원 등 수도권 공공의료기간에 우선 채용이 되는 인원을 양성하여서는 낙후지방 의료 환경 개선, 혹은 기피되는 필수과 의료행위 개선이라는 목표가 당연히 달성이 되지 않는다.


그런데 그 본질을 그대로 둔 채, ‘기득권 의사, 적폐, 밥그릇 싸움’ 이라는 프레임을 씌우며, 화려한 정치적 수사를 구사하며, 어떻게든 이 정책을 강행하려 한다.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란 말인가. 처음엔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점점 알 것 같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생명을 좌지우지할 정책의 결정 과정에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정치 논리를 대입시킬 수 있는 것일까. 참담하다.


현재 파업을 이유로 진료를 중단한 응급실과 중환자실은 없다. 그놈의 밥그릇 싸움과는 전혀 무관한 노교수님들이 수십 년 만에 당직을 서며 응급실과 중환자실을 커버하고 있다. 돈독이 잔뜩 오른 일부 의사들이 아니라, 아직 면허도 취득하지 못한 의대생, 거대 병원의 소모품에 불과한 전공의, 곧 은퇴를 바라보는 교수들까지 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 의료 정책만큼은 지역구 치적, 표심을 위한 정책이 아니라, 그저 사람을 살릴 수 있는 정책이기를 간절히 바란다. 정치를 모르고 싶다. 의사는 정치를 몰라야 한다. 어느 분야보다도, 생명을 다루는 분야이기에 그렇다.


이런 파업을 원하는 의사는 아무도 없다. 새벽에 일어나 루틴 잡을 마치고, 자신의 당직 콜을 받을 교수, 전임의에게 환자 인계를 하고, 그러고도 응급으로 발생한 뇌출혈 환자 수술을 위해 다시 병원으로 들어와 수술대에 서는 (해당 신경외과 전공의는 보건복지부로부터 고발당했다.), 필수 의료는 결코 중단하지 않는 파업이다. 지금의 파업은 파국이다. 이 외의 다른 어떠한 방법으로도, 심지어 이 파국을 통해서도 현장의 목소리는 정책입안자들에게 전해지지 않고 있다.


매일 아침 기도한다. 부디 아무도 다치지 않기를, 어서 이 파국이 끝나기를, 의사들이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어제는 잠이 오지 않아 단톡방에서 이야기를 나누던 아는 동생에게 따로 물어보았다. “지금 이 사태에 어떤 관점을 가지고 있어? 어떠한 이해관계에도 영향을 받지 않는, 사회의 상식적이고 솔직한 의견이 궁금해 너에게 물어보는 거야.” 동생은, 솔직히 사람 아픈 걸로 밥그릇 싸움을 하는 것 같아 좋게 보이진 않는데, 관심 자체가 없어서 잘 모르겠다고 했다. 내 이야기에 영향을 받지 않고 본인이 알아서 판단해 보고 싶으니 이에 대해 알아보는 데 30분만 달라고 했다. 그로부터 3시간을 훌쩍 넘긴 새벽 한 시, 연락이 왔다. “오빠, 이거 실화에요?”


어쩐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 친구가 기꺼이 자신의 귀한 세 시간을 할애해 준 것은, 겉으로 보기에는 탐탁지 않지만 이 인간이 그렇게까지 경우 없는 인간은 아닌데,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 이야기를 하나, 일말의 의문을 가져줬기 때문일 것이다.


그간 아무 글도 쓰지 못했다. ‘설마 그렇게까지 심했으리라고.’ 라 생각했던 것들이 하나 둘 씩 현실로 드러나는 과정, 그리고 이를 무마하고 정치적인 대립으로 변질되는 과정에서 느끼는 마음의 소용돌이가 너무 거칠어 어지럽고 지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힘을 내기로 했다. 수많은 이들이 돌을 던질 이 글을 당신에게 전할 수 있는 것은, ‘그래도 이 인간이 예전에 썼던 글이 있는데, 한 번 읽어는 보자.’ 라는 마음 덕분이 아닐까, 혼자 짐작해 본다. 그래서 이를 악물고 더 좋은 글, 마음에 닿는 이야기를 써야겠다, 다짐한다. 앞으로도 ‘이 인간 그렇게 안 봤는데, 도대체 왜 이러는 거야’ 란 조그만 파문을 던질 수 있도록.

아내와 아이는 잠든 지 오래, 또 다시 잠 못 이루는 밤을 맞아 돌 맞을 것이 뻔한 공허한 글 한 편을 던진다. 그리고 바란다. 적어도 누구나 믿고 보편적인 상식에 부합하는 흐름이 이루어지기를, 생명에는 어떠한 정치 논리도 개입되지 않기를, 무엇보다도 제발, 이 말도 안 되는 소란들로 아무도 다치지 말고, 아무도 아프지 말기를. 아무런 종교도 없어 배운 적도 없는 기도를 하염없이 올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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