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에 다른 이름이 붙는 과정.
[대구 수성구 범어동 이두형 정신건강의학과]
살면서 격하게 화가 났던 몇 순간들을 되돌아 본 적이 있다. 아마 정신분석에 대해 처음 매료되기 시작할 때 즈음이었던 것 같다. 완벽하지 않은 내가 완벽하지 않은 인생을 살아가며 화낼 일이 있는건 당연한 일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건 내가 생각해도 과한데' 라는 느낌이 들 때가 종종 있다. 심지어 화를 내는 도중에도 '아 이렇게 화낼 일은 아닌데' 라 생각하면서도 흥분을 죽이기 힘들 때도 있다.
사소한 금전 문제, 어그러진 약속, 대화의 핀트가 어긋나는 상황들... 강렬하게 화를 냈다는 감정에 대한 기억만이 남아 있을 뿐, 왜 그토록 화가 났었는지 지금은 잘 기억도 나지 않는 순간들. 충분히 그정도로 화를 낼 만 했지, 라는 생각 보다는 왜 그정도 일로 나는 그토록 화가 났을까 라는 후회와 그로 인해 틀어진 인연에 대한 아쉬움이 더욱 밀려온다. 그런 순간들을 돌아보며 한 가지 공통점을 알게 되었다. 꽤 많은 순간 나는 스스로가 약점이라고 생각하는 나의 모습이 드러나는 느낌을 받을 때, 이를 방어하기 위해 화를 내고 있었다는 것을.
타인에게는 사소하지만 나에게는 사소하지 않은 마음들이 있다. 돈 앞에서 부모가 다투고 눈물 흘리는 장면을 본 적이 없는 사람은 그런 경험이 있는 사람이 100원, 1000원에 왜 그렇게까지 민감해 지는 지 알기 어렵다. 늘 부모와 주변의 사랑을 받은 이는, 그렇지 못한 이가 어째서 자신을 아껴주지 않는 이와의 관계에 그렇게까지 매달리는 지를 이해하지 못한다.
타인에게는 아무일도 아닌 것이 내게는 유독 민감하게 느껴진다는 것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그 당사자다. 그 민감함의 근원에는 그토록 잊고 싶은 아픈 과거가 있다. 이를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 마음을 외면하고 싶어진다. 그래서 지금의 이 상황은 내가 민감한 것이 아니라, 네가 둔감한 것이기를 바라게 된다. 화는 나의 아픔을 정당화하는 수단이다. 나는 나의 아픔으로 인해 이상해진 사람이 아니야. 나에게는 그런 힘들었던 과거가 없어. 애써 깊이깊이 숨겨둔 기억이 행여나 다시 올라올 새라, 무의식은 거친 말과 행동으로 그러한 감정들을 가리고 무마시키려 든다.
충분히 이해되지 못한 상처는 약점으로 느껴진다. 마음의 상처가 깊은 이들에게는 이러한 취약성이 타인에게 드러나면 스스로가 문제가 있는 사람으로, 부족한 사람으로, 피해야 할 사람으로 인식될 것이란 불안이 존재한다. 화는 그러한 나의 약점을 숨기고 두려움을 외면하는 수단이다. 나는 그런 부족한 측면이 있는 사람이 아니며, 지금 내 마음에서 유발되는 갈등은 너의 잘못이야, 라 항변하는 것이다.
그러나 내 상처의 맥락을 모르는 이는 이러한 나의 반응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이 사람은 왜 이렇게 사소한 일로 날을 세울까? 이 사람은 왜 이렇게 예민하고 화를 잘 낼까? 내가 살아온 과정과 그 때 느꼈던 마음을 안다면 그도 내 마음을 이해라도 해주련만, 나조차도 바라보기 힘들어 마음 깊이 숨겨둔 나의 아픈 인생사를 타인이 이해해주기란 요원하기만 하다. 그렇게 나는 타인에게 불편한 사람, 이상한 사람이 되고, 내가 원했던 기회들로부터 멀어지게 된다. 그렇게 과거의 상처는 지금의 아픔으로 재생산된다.
그러나 스스로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고 또 보듬다 보면, 내면의 상처 역시 숨겨야 할 약점이 아니라 단지 완벽하지 않은 내가 완벽하지 않은 삶을 살며 느끼는 자연스러운 현상 중 하나일 뿐임을 깨닫게 된다.
나의 마음을 알아준다는 것은 마음에서 발생하는 감정이 시키는 대로 거칠고 날이 선 말을 한다는 것은 종종 동일한 것으로 혼동된다. '그래도 할 말은 해야겠어!', 혹은 '이렇게 내가 머리끝까지 화가 나는데, 결코 참을 수 없어!' 와 같은 생각이 들 때, 그 생각대로 행하는 것을 내 마음을 이해하는 것이라 믿는 경향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마음에 강렬한 충동이 드는대로 행동을 하는 것과 스스로의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은 별개의 일이다.
진정으로 마음을 이해한다는 것은, 소중한 관계,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소중한 내 삶을 해칠 지도 모르는 화. 그 화를 내기 전, '내 마음에는 왜 이렇게 화가 날까, 나는 주로 언제 화가 나는 걸까, 그 과정은 무엇일까.' 를 찬찬히 되돌아 보는 것이자, '아, 그래서 그럴 수 있었겠구나. 다른 사람들에게는 아무렇지도 않은 그것이 내 마음에는 그토록 불편했던 이유가 그런 것이었구나.' 라 알아차리는 과정이다. 그리고 '그런 과정으로 나는 늘 힘들고 슬펐구나. 고생이 많았구나.' 라며 옳고 그름의 관점을 벗어나 힘든 그간의 시간들을 안아주는 과정이며, 그 이해와 위로를 바탕으로 화를, 나와 내게 소중한 사람들이 다치지 않는 방향으로 풀어내는 과정이다.
그렇게 마음을 이해하고 또 보듬다 보면, 타인에 대해 함부로 재단하고 입방아를 찧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하면 나의 부족한 부분을 숨길 수 있을까' 를 고민하는 시간들이 아깝고 무용하게 느껴지기 시작한다. 나의 취약성을 건드리는 이에게 '그렇게 무례한 당신은 틀렸어.' 라며 굳이 화를 내고 논쟁을 이어가며 또다른 상처의 씨앗을 뿌리지 말자 라는 다짐이 찾아온다. 그렇다고 내려놓거나, 피하거나, 마냥 인내하자는 이야기는 아니다. '당신의 그러한 이야기가 다른 사람들이나 당신에게는 아무렇지 않은 이야기일진 몰라도, 내게는 아프게 느껴져요.' 라는 이야기를 건넬 수 있게 된다.
이는 내가 건넬 수 있는 가장 솔직한 이야기이자, 어떤 화보다도 내 마음을 더 이해해주고 또 지켜주는 이야기이다. '지금이 화를 낼 만한 상황인가.' 에 대해서는 모든 사람의 기준이 다르고 늘 논쟁이 발생한다. 그러나 나는 그러한 당신의 이야기나 행동에 상처를 받기 때문에 '그게 어떠한 것이든' 그만 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대인관계에서, 아무리 선의이든 진심이든 한쪽이 원치 않는 것을 다른 쪽이 행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설사 나의 취약점을 자극하는 그의 행동이 반복되고 수정되지 않을지라도, 나는 내 마음을 깊이 이해했고, 화 대신 그 마음을 있는 그대로 상대방에게 전달했다는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
그러니 혹 당신에게 도저히 참을 수 없는 화가 밀려온다면, 혹 이를 유발하는 상황, 상대의 말과 행동이 잊고 싶었던 나의 과거, 상처, 취약한 지점을 건드리고 있는 것은 아닌 지 돌아보면 좋겠다. 그리고 애써 그 아픔을 숨기느라 강한 말로 스스로를 방어하는 대신, 나는 당신의 그 말에 가슴이 아파, 라 솔직하게 이야기를 해 보면 어떨까. 익숙하진 않지만 어떠한 화 보다도 당신의 불편한 감정을 잘 보듬어 줄지도 모른다.
*P.S.
만약 용기를 빌어 솔직히 드러낸 나의 속내를 빌미로 나의 약점을 쥐고 흔드려는 사람, 내밀한 이야기를 나에 대한 비난을 심화하는 도구로 사용하는 사람이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하냐고? 축하한다. 당신은 비로소, 그가 당신의 마음을 그렇게까지 할애하지 않아도 될 사람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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