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는 정신과 의사 Apr 09. 2021

감정을 이해할 땐, 멜로디에 셈여림을 더해주세요.

내 감정이지만 도무지 어떻게 해야할 지 모르겠다면.



  피아노는 피아노포르테의 줄임말이다. 학창 시절 외었던 피아니시모- 피아노(약하게)- 메조피아노- 메조 포르테- 포르테(세게)- 포르티시모의 셈여림 말 중 그 피아노와 포르테가 맞다. 피아노, 단어가 우아하고 세련되긴 한데 화려한 멜로디와 박자를 능히 표현하는, 악기의 황제라 불리는 이 건반악기의 이름으로 왜 셈여림 말이 붙었을까.
 
  피아노의 전신이라 할 만한 건반악기로 하프시코드와 클라비코드라는 악기들이 있었다. 하프시코드는 건반을 누르면 현이 뜯기는 원리라 아예 셈여림 표현이 불가능했고, 클라비코드는 셈여림 표현이 어느 정도 가능했으나 여러 음의 연속적인 표현이 어려웠고 음량 크기 자체가 너무 작았다.
 
  반면 피아노는 타건 현악기로 건반을 누르면 건반에 연결된 해머가 현을 땅, 때려 소리를 낸다. 현을 때린 해머는 바로 제자리로 복귀하는데, 이러한 원리 덕분에 피아노는 재빠른 연속음은 물론 연주자의 섬세한 손가락 세기 변화까지도 세밀히 표현해준다. 화려하고 빠른 변화의 멜로디와 더불어 세심한 세기의 조절이 가능한 피아노는 혁신이었다. 그러한 혁신에 대한 찬사로 이 악기의 이름은 피아노포르테가 되었으며 시간이 흘러 피아노로 줄여 불리게 되었다.
 
  사람들은 이전의 건반악기에 비해 왜 그렇게 피아노에 매료되었을까. 이전의 악기들도 그 나름의 매력이 있었다. 실제로 하프시코드의 경우 그 음색 특유의 매력 덕에 현대의 키보드에서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뿌- 하는 공기 반 소리 반 의, 들으면 아~ 하실 그 멜로디.) 그러나 나름의 이점들에도 불구하고 피아노가 독보적으로 사랑받는 이유는 작곡가, 그리고 연주자들의 마음을 가장 섬세하게 표현할 수 있는 악기이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깃털로 건반을 터치하듯 연주해야 하는 드뷔시의 곡을 라캄파넬라의 절정처럼 격정적으로 연주한다면 작곡가가 본디 의도했던 느낌이 전혀 전해지지 않을 것이다. 같은 달빛이라도 드뷔시의 그것이 마치 첫사랑의 연인과 손을 잡고 성당을 은은히 비추는 느낌이라면 베토벤의 월광 소나타는 오래된 연인과의 이별 후에 쓸쓸히 거실을 드리우는 달빛을 홀로 바라보는 느낌이다. 물론 멜로디가 완전히 다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셈여림이 조절되지 않는 하프시코드로 그 차이가 온전히 표현될지는 의문이다. 심지어 같은 곡을 쳐도 연주자의 주법과 감성에 따라 완전히 다른 곡으로 표현되는 것이 피아노의 묘미다.
 
  어떠한 악기보다도 섬세하게 예술가의 마음을 드러내어 주는 악기. 피아노가 그토록 각광을 받았던 이유 아래에는, 보이지 않는 마음을 어떻게 표현할 지에 대한 인간의 고민이 녹아 있다.
 




  홀로는 살아갈 수 없는 사회적 동물인 인간에게, 보이지 않고 실체가 없는 마음을 타인에게 전하는 것은 언제나 삶의 가장 중요한 화두 중 하나였다. 하프시코드만 존재하던 세계에 피아노가 발명된 것이 음악인들에게 축복이었듯, 표정과 소리, 몸짓으로 마음을 표현하던 인간에게 언어가 주어진 것은 혁신이었을 것이다. 슬퍼, 라는 한 단어에 담을 수 있는 이야기가 얼마나 많고, 또 이 단어는 얼마나 많은 상황에서 변주되어 사용될 수 있는지. 언어로 말미암아 우리는 너무도 편리하고 간결하게 서로의 마음을 주고받는다.
 
  그런데 우리는 그 편리에 경도되어 우리의 마음을 너무도 투박하게 드러낸다. ‘슬픔’ 이라는 단어가 적용될 수 있는 느낌은 무한대로 많다. 친했던 친구와 돌아섰을 때, 가족이 세상을 떠났을 때, 원치 않는 이별을 마주했을 때, 시험이나 면접이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때 ...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상황의 제각기 다른 감정들이 슬프다는 한마디로 간결하게 표현된다.
 
  감정은 우리의 몸과 마음이 우리에게 보내는 신호이자 우리가 원하는 행복으로 우리를 인도하는 이정표다. 그러나 그 원과 방향을 잘못 읽어내면 우리가 의도치 않은 방향으로 삶이 흘러 오히려 행복과 멀어지기도 한다.
 
  예를 들어 슬프고 우울할 땐 곧잘 친구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거나 밤을 새워 노는 것으로 마음을 달래는 이는 ‘슬픔’ 이라 인식되는 느낌이 찾아올 때 마다 익숙하게 술 약속을 잡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 날의 울적함은 따뜻한 차 한 잔과 함께 사색에 잠기기를 원하는 신호였을 수도 있고, 아무도 모르게 홀로 훌쩍 떠나고픈 마음이었을 수도 있다. 그런 감정을 ‘슬픔’이라는 단어로 통칭하던 다른 감정들과 동일하게 인식하여, 음주가 제공하는 잠깐의 쾌락만을 찾게 된다면 그 무거운 감정은 지친 몸과 함께 한층 더 깊어질 지도 모른다.
 
  이렇듯 우리는 감정을 대할 때 그것이 좋은 지 나쁜지를 나누고, 익숙한 감정의 범주들 중 어떤 범주에 해당하는 지 정도로만 분류한다. 그리고 나쁘다고 인식되는 감정에 대해서는 이를 깊이 돌아보기보다는 없애거나 이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찾으려 몰두하곤 한다.
 
  대표적인 불편한 감정 중 하나인 불안은 위험한 공사현장을 지날 때도 느낄 수 있지만, 우호적이지 않은 동료들과 함께하는 직장생활에서, 혹은 중요한 발표를 앞두고도 느낄 수 있다. 이러한 불안 앞에서 우리는 우선 '불안해' 라는 거친 한 마디로 지금의 느낌을 감정의 범주에 맞추어 지금의 느낌을 이해한다. 그리고 '불안할 때는 그 느낌을 피해야 한다.' 라는 투박한 원칙에 따라 그 느낌을 회피할 방법을 찾곤 한다.
 
  머리로 떨어지는 벽돌은 물론 피하는 것이 좋겠지만, 부담되는 발표 기회나 불편한 사람들을 피하는 것이 내가 원하는 방향이라는 보장은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불편한 만남을 미루거나, 모든 일을 그만두고 훌쩍 떠나버릴 생각에 몰두하거나, 과음을 함으로써 그러한 감정을 무디게 만들거나 피하려 시도한다.
 
  발표를 앞둔 긴장은 그것을 더 잘 해내고 싶다는 신호이며, 동료들을 무관심이 아닌 불편함으로 인식하는 것은 그들과 잘 지내고 싶다는 소망, 혹은 필요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지 그 느낌을 ‘불안’ 이라는 쉬운 단어로 표현하고, ‘불안은 피하거나 제거해야 한다.’ 는 생각에 사로잡혀 그런 시도를 반복할수록 감정은 더 예리해지고 버거워진다. 그 느낌이 존재하는 심층적인 이유들은 모두 무시한 채 단지 그러한 감정을 억누르려고만 하는 시도는 오히려 반발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이는 슬퍼, 라고 말을 걸어오는 친구에게 그러한 이유, 깊은 자초지종을 함께 이야기하기도 전에 그래? 그럼 운동을 해봐, 여행을 떠나 봐, 라고 쉬운 해결책을 건네는 것과 같다. 일시적으로 무마되는 느낌 이외에 그러한 방법들이 나의 마음과 삶을 좋게 해주진 않는다. 그 친구에게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그래? 무슨 일 있었어?’ 라며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도, 우리가 귀를 기울여주기를 기다리고 있다. 우울하니 이런 것을 해보자, 불안하니 이렇게 대처해 보자 라 섣불리 결정하기보다 그 우울, 불안이라 쉽게 표현되는 세세한 감정들을 조금 더 돌아보고 이해해 주면 어떨까.
 




  지금 당신의 마음은 당신에게 어떤 느낌을 전하고 있는가? 당신의 감정은 당신에게 좀 더 깊이 이해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 감정을 포함할 만한 단어를 붙이는 것으로 이를 온전히 이해했다고 인식하는 것은 너무 얕고도 심심한 일이다.
 
  마음이 무엇을 원하는 지, 어떤 이야기를 내게 감정을 통해 건네고 싶은 지를 알아보는 방법은 간단하다. 그 감정을 컨트롤 하겠다는 마음, 나쁜 느낌을 어떻게든 몰아내겠다는 의도는 우선 내려놓는 것이다. 그리고 하프시코드로 멜로디만을 연주하듯, 슬프다, 피곤하다, 불안하다 어렴풋하게 표현했던 감정에 셈여림을 더하듯 더욱 세밀히 감정을 표현해 보는 것이다.
 
  새로운 연인이 될 수 있을 것이란 두근거리는 설렘이 있는가 하면, 결코 이어질 수 없을 것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는 서글픈 설렘도 있다. 모든 것을 다 내려놓아야 비로소 홀가분해질 부담감이 있는가 하면, 꾸역꾸역 이겨낸 성취감으로 씻어낼 부담감도 있다. 가까운 친구들과 떠들썩하게 함께 나누고 싶은 기쁨도 있지만 아무도 모르게 짓는 미소로 간직하고픈 기쁨도 있다.
 
  슬퍼, 몰라 그냥 다 짜증나, 불안해, 어떡해야 할 지 모르겠어. 스스로의 감정이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그리고 그 감정을 어떻게 대해야 할 지 모르겠다면 우선 감정을 ‘다루겠다는’ 마음은 조금 내려두자. 그리고 있는 그대로의 그 느낌을 좀 더 자세히 그려 보고, 좀 더 깊이 헤아려 보자. 하프시코드의 멜로디만으로 연주되던 감정에 피아노의 셈여림을 담듯 조금 더 섬세한 언어로 감정을 표현해 보자. 그 감정의 질감은 어떻고, 어떤 색과 온도가 어울리는지, 언제 깊어지고 어느 때 가벼워지는지. 혼자 간직하고픈지 누군가와 함께하고 싶은 지. 함께하고 싶다면 그 존재는 누구인지.
 
  그렇게 차근차근 마음에서 전해지는 느낌을 좀 더 농밀하게 연주하다 보면 들려올 지도 모른다. 늘 진심으로 살아감에도 막막하고 버거웠던 이유가, 그리고 그토록 바랐던 평온과 행복으로 향하는 실마리, 스스로가 진정으로 원하는 삶과 하루의 모습이.




https://m.blog.naver.com/dhmd0913/222239514194

https://m.blog.naver.com/dhmd0913/222250273249

https://m.blog.naver.com/dhmd0913/222029009200


매거진의 이전글 마음에는 빼기가 아닌 더하기만 가능하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