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과 의사로서 꼭 손에 넣고 싶은 도구가 하나 있다면 '기억 가위' 다. 진료실을 찾는 이들의 기억 중 잘라내면 좋을 것들만을 적당히 골라 잘라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많은 이들이 아픈 기억을 잊음으로써 마음의 평안과 행복을 구하려 하고, 그러한 바람을 위한 많은 치료와 면담이 고안되었다. 그러나 아픈 기억과 그로인한 힘든 감정들을 마음에서 제거하려는 노력은 종종 무위로 돌아간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 잊었다고 할 만할 즈음마다 지나간 아픔들은 다시 되살아나 우리를 괴롭히곤 한다. 현대의 연구들은 이러한 우리의 경험이 단지 느낌만이 아님을 증명하는 중이다. 뇌에 관한 최신의 연구들을 통해, 이미 형성된 기억이나 습관은 소멸될 수 없고 단지 변형되거나 대체될 수 있다는 것이 점점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유명한 파블로프의 개 실험으로 이야기로 예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밥을 먹을 때 마다 종소리를 울리면 개는 종소리만을 울려도 침을 흘리게 된다. 그런 조건화가 형성된 개에게 이번에는 종소리만을 울리되 밥을 주지 않으면, 개는 점차 종소리만으로는 침을 흘리지 않게 된다. 과거 과학자들은 이러한 반응을 '소거' 라 칭해 왔다. 즉 이미 형성된 ‘종소리 > 침’ 이라는 조건화가 사라졌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현대의 뇌 과학적 연구는 이러한 소거 반응 역시 소멸된 것이 아니라 ‘종소리가 울려도 밥을 주지 않는다.’ 는 다른 조건화로 대체된 것으로 본다. ‘종소리가 울리면 밥이 주어진다.’ 라는 기억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이제는 종소리가 울려도 밥은 없다.’ 라는 새로운 기억이 기존의 기억을 대체한 것이다. 어쩐지. 힘들거나, 부끄럽거나, 잊고 싶었던 기억들은 잊었다 생각할 만 하면 꼭 다시 떠오르는 이유는 우리의 뇌가 그렇게 생겨먹었기 때문이었다.
연애가 중요한 화두였던 이십대 때, 실연의 아픔으로 힘들었던 적이 있다. 만남의 기억이 아름다울수록 이별 후의 힘듦은 배가되어 돌아오게 마련이다. 그렇게 힘들어하던 내게 주변의 자칭 '연애 고수' 들은 잊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제는 잊고 잘 지내야지, 더 좋은 사람 만나야지, 예전의 너로 돌아가야지. 맞는 말이라고 생각했고 잊으려 노력했다. 그런데 잊는다는 그 말에는 모순이 있었다. 그 모순이란 '더 이상 그를 기억하지 않아' 라고 말하는 순간 내 마음속에는 그와 함께 했던 기억이 한 번 더 떠오르게 된다는 것이었다. 억지로 괜찮은 것처럼 밝게 웃으며 하루를 보내고, 친구들과 만나 술잔을 기울일 때면 이제는 다 잊었지, 라고 호기롭게 말하는 그 순간 나는 그토록 잊고 싶은 그 때의 기억을 한 번 더 떠올리고 마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다시 힘들어지는 과정을 반복하고 있었다. 그리고 여러 해가 흐르고, 여러 인연과 만나고 또 헤어졌다. 하루의 모습들, 신경 써야 할 일들, 소중한 사람들이 조금씩 달라졌고, 마음을 기울일 일들도 달라졌다. 그리고 기억도 점차 흐려졌다. 잊었냐 하면 그런 것은 아니다. 떠올리면 늘 그 기억은 그 자리에 있었다. 단지 떠올리는 것 자체를 잊었을 뿐이다. 달라진 하루, 달라진 신경 쓸 것들, 달라진 소중한 사람들을 마음속에 채우느라 그리운 순간이 있다는 사실, 그런 기억 자체를 잊고 싶다는 사실 자체를 잊고 지냈던 것이다. 이미 만들어진 기억을 사라지게 하는 것은 어렵지만, 그것을 떠올리는 것 보다 더 소중한 것들을 만들어 나가는 것은 가능하다. 조금 더 어린 날 미리 알았더라면 참 좋았을 삶의 원리이다.
지우기를 원하는 기억만을 깨끗이 뽑아내 지우는 방법, 그 일이 없었던 이전의 나 자신으로 돌아가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과거의 상처로 아픈 마음을 대하는 방법으로 그 기억을 지울 수 있는 방법을 찾는데에, 일상으로 돌아가기 전 우선 그 기억이 없었던 과거의 마음으로 돌아갈 방법을 찾기에 몰두하는 것은 그리 현명한 방법이 아닐 수 있다. '잊고 싶다' 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 그 지우고 싶은 기억을 한 번 더 떠올리게 되고 더욱 마음에 각인시키는 것이 우리 마음의 원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일단 살아가는 마음이다. '지금 당장은' 그 기억과 그로 인한 아픔은 어쩔 수 없음을 받아들이되, 그 기억을 이겨내기 위한 하루가 아니라 보내고 싶은 하루를 보내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이별의 슬픔을 잊기 위해’ 여행을 떠나는 것은 그리 효과적이지 않다. 새 여행지에서 맞는 순간 순간 마다 아픔이 얼마나 사라졌는지를 살핀다면, 그다지 사라지지 않은 기억과 슬픔 앞에서 꾸준히 좌절하게 될 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답답함과 막막함으로 인해 아름다운 여행지의 풍경, 이색적인 음식의 맛 같은 건 전혀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그 대신 이별의 아픔은 지금은 어쩔 수 없는 것이라 받아들이고, ‘이별 때문에 슬픈 채로’ 여행을 떠날 수도 있다. 이 둘은 같은 듯 전혀 다르다. 슬플 때는 그 감정은 지금의 내게 자연스러운 것이라 마음을 다독여 주고, 아픔의 무마라는 목적을 위해서가 아니라, 마음속에 가득한 슬픔을 안은 채 여행 그 자체가 주는 안식과 기쁨을 느껴보는 것이다. 한 번의 여행, 하루만큼의 업무, 한 달 치의 운동이나 취미생활을 통해 아픔의 기억이 사라질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단지 그렇게 내게 필요하거나 소중한 것들을 쌓아가다 보면 어느 새, 나도 모르는 사이에 마음이 그것들을 떠올리는 것보다 더 중요한 다른 일들에 시선을 두기 시작할 지도 모른다.
잊어지지 않는 것, 가만히 있어도 힘든 그 때의 생각이 떠오르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며 당신의 잘못이 아니다. 잊을 수 있는 경험은 없다. 우리가 잊을 수 있는 유일한 것은 그것을 잊어야 한다는 마음이다. 사라지는 기억은 없다. 그러나 지금, 여기의 삶에 충실하게 될 때, 오늘의 하루에 과거를 회상하는 것 보다 더욱 소중한 것들이 늘어갈 때 구태여 과거의 기억을 구태여 회상하며 보내는 시간은 줄어간다. 만약 당신이 과거의 기억과 그로 인한 상처를 잊는 방법을 찾고 있다면, 그리고 그러한 시도가 늘 좌절로 끝나 눈물짓는 중이라면 이야기를 건네고 싶다. 그 과거는 당신의 마음 한켠에 늘 자리하고 있을 것이지만, 그렇게 삶을 이어가다 보면 그 기억을 잊어야 한다는 사실 자체를 잊게 되는 순간이 꼭 찾아 올 것임을. 그러니 우리를 괴롭히는 경험이 마음에서 떠나지 않는다면, 그 기억과 아픔이 사라지기 전까지 일상을 유예하기 보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하루를 이어 가는 것이 좋을 지도 모른다. 지금의 삶에 몰입하느라 추억하는 것을 잊는 것, 그것이 뺄셈은 없고 덧셈만 있는 우리의 마음에 가능한 유일한 망각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