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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는 정신과 의사 Dec 13. 2022

노력이 충분하면 모든 것이 잘 될까

진정한 노력의 의미란


[대구 수성구 범어동 이두형 정신건강의학과]



학업의 부담으로 우울과 불안에 시달리다 병원에 방문하는 이들이 많다. 이들에게 '성적은 노력에 달린 걸까요?' 라 질문하면 100이면 100 그렇다고 답한다. 그들에게 '음.. 아니요. 저는 성적은 노력에만 달린 건 아니라 생각해요.' 라고 이야기하면 의아해 한다. 보호자가 함께 면담 중 일 때는'이 인간이 열심히 공부하는 우리 애에게 무슨 이상한 소리를 하려고 그러나' 당혹스러워 하는 경우도 있다.


한국의 수험생들에게 노력 만능주의는 신념이다. 불안도가 높은 부모일 수록 아이의 성적이 미흡한 것과 아이의 미래 속 불행을 연결짓는 경향이 강하다. 그리고 그 예측된 두려움은 아이에게 그대로 전가된다. 목표하는 성적 (당연한 말이지만 그 기준은 평균이 아닌 상위권 혹은 최상위권이다.)에 다른 변수가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불안한 학생과 학부모 모두를 오히려 더 두렵게 한다. 반면 열심히만 하면 좋은 성적을 얻을 수 있다 라는 관점은 열심히만 하면 되니까, 라는 심플한 결론으로 이어지며 '생각 자체로는' 안도를 준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성적이 노력과 100% 비례하기는 힘들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각을 잡고 정말 열심히 준비한 시험에서도 출제 범위가 공부 핀트와 맞지 않아 결과가 엉망이 되기도 하고, 쫓기듯 벼락치기로 기출 문제만 훑듯이 준비한 시험이 그대로 족보를 타서 좋은 성적이 나오기도 한다. 열심히 한다고 해서 시험 당일 컨디션이 좋다고 보증할 수 없고, 오히려 무리하다가 컨디션이 더 망쳐지기도 한다. 심하게는 시험 당일 먹은 음식에 탈이 날 수도 있다. 잘해야 한다는 마음이 지나쳐 오히려 부담감과 긴장에 압도되어, 정작 본 시험날에는 문제조차 제대로 풀지 못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러한 뻔한 사실을 애써 외면하려 한다. '열심히 하기만 하면 원하는 것들을 다 이룰 수 있어!' 라며 부모는 자식을, 수험생은 스스로를 다그친다. 그리하여 원하는 결과가 주어지는 것이 행복의 유일한 열쇠가 되고, 그 열쇠를 획득하지 못하는 것은 성심을 다하지 못한 증거가 된다. 최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기대가 어긋나거나 예상치 못한 좌절이 일어날 수 있는 것이 삶인데, 이 당연한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은 누구에게나 어려운 일인가 보다. 나 역시 이를 받아들이는 데 근 30여년이 족히 걸렸다.







지금도 그렇지만 입시 때 의대 문턱을 넘는 것은 만만치 않았다. 그 과정을 꽤 성공적으로 마쳤다고 자부했던 나는, 스스로의 학업 능력 뿐 아니라 노력 능력까지도 과신했다. 시건방지게도 그때의 나는, 성적이 잘 나오지 않는 친구들을 함부로 폄하하며 그들에게는 무엇이든 문제가 있을 것이라 암묵적으로 평가절하하곤 했다. 공부 시간이 부족하면 노력이 부족한 것이고, 공부 시간이 충분하고 열심히 하는데도 성적이 미진하면 노력하는 방법을 잘 모르는 것이라 간주했던 것이다. 돌이켜보면 정말 부끄럽고 오만하기 짝이 없는 생각이다.


노력과 성적의 상관관계에 관한, 의대를 다닐 때 흥미로운 에피소드 두 가지가 기억난다. 하나는 '스캐너 친구' 에 관한 것이다. 고작 몇 년 만에, 학업에 대해서는 자신이 있던 나의 큰 코가 무참히 깨진 계기다. 이 친구는 공부를 할때 줄을 치며 요약을 하거나 필기를 하지 않는다. 공부 시간도 매우 짧다. 그저 교과서나 친구가 요약한 노트를 물끄러미 읽기만 한다.


그런데 그렇게 하면 그의 머리속에는 한 번 읽은 페이지가 스캔이 된다. 나라면 한 페이지로도 한 시간을 씨름할 내용을 이 친구는 한 번만 슥 훑어도 몇 문단 몇 째 줄에는 어떤 내용이 있다는 식으로 머리에 기록이 된다. 충격이었다. 이런 놈이랑 같은 시험방법으로 경쟁을 하고 있었다니, 허망하기도 했고 이런 분과 감히 같은 학교를 다니고 있다니, 황송하기도 했다. 그러고 보면 의대에는, 그렇게 열심히 공부하지 않아도 성적은 꽤 상위권을 유지한다는 것을 은근한 자랑으로 삼는 이들이 많았다. 그에 반해 나는 꽤 열심히는 하는데 까보면 성적은 대단하지 못한 둔재였다. 그런 괴리가 서글펐다.


또 다른 에피소드는 '족보 거부 형님' 에 관한 것이다. 이 형은 공부할 때 소위 족보, 선배들로부터 내려오는 시험문제 예시를 보지 않았다. 대신 교수들이 지정해주는 원서를 읽고 강의록을 열심히 공부했다. 지식의 넓이와 깊이로는 당연히 동기들 중 이 형을 따라올 자가 없었다. 문제는 시험 성적이 그렇지 않았다는 데 있다. 족보 그대로 숫자만 달리 나와 동기들은 거의 100% 맞추는 문제도, 이 형의 공부 핀트에 들어있지 않으면 혼자 틀렸다. 그럴때마다 형은 분노했다. 교수들은 강의 시에 족보 같은 건 펴지도 말고 원서와 강의록만 봐도 충분하다고 강조했기 때문이다. 분노할 만도 하다.


이러한 류의 에피소드를 6년간 경험하며 처음 겪은 변화는 노력만능주의에 대한 냉소였다. 의대 생활은 비단 학업능력 뿐 아니라 부모의 직업, 재력, 사회적 지위 라든지, 외모라든지, 사회성이나 성격.. 정말로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것들을 접하는 연속이었다. 노력만으로 안되는 것, 아무리 열심히 하여도 어찌하기 힘든 것들이 존재함을 받아들이는 과정이 서글펐다. 비학군지 일반 고교에서 우물 안 개구리처럼 시험 성적이 좀 좋다고 우쭐하여 타인의 삶과 노력을 함부로 폄하했던 나의 과거가 초라하고 또 부끄럽게 느껴지는 시간들이었다.







수용 전념 치료를 접하고 정신과 진료를 이어가며 비로소 느끼게 된 것이 있다. 노력을 해서 원하는 결과를 얻어내는데 성공하면 행복해지고 그렇지 않으면 불행해진다는, 그간 적용되었던 근본적인 삶의 원칙이 실제 행복에는 그리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것을. 단기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들에 슬퍼하고 그 실패의 기록을 반추하느라 미처 느끼지 못했던 일상의 사소한 소중함과 의미들이 참 많았다는 것을.


인생에는 어찌할 수 없는 것이 존재함을 수용하자, 비로소 어찌할 수 있는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모든 것들을 내가 원하는대로만 이룰 수는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내가 '어찌할 수 있는 것'에 전념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진정한 의미의 기쁨은 가뭄에 콩나듯 원하는 결과물이 주어졌을때 느낄 수 있는 찰나의 쾌감이 아니라, 무던한 하루에 몰입하며 살아가는 그 자체로부터 주어지는 충만함임을 깨닫게 되었다.


그런 과정에서 '노력해야 해!' 라 스스로를 채근하는 일은 오히려 없어졌다. 오버타임 진료를 마치고 겨우겨우 집에 들어서 쓰러져 잠이 들거나, 아이를 겨우 재우고는 탈진해 유튜브를 보는 나를 비난하지 않게 되었다. 대신 그러한 피로를 무릅쓰고도 마냥 누워있는 것 보다 나은 게 있다면, 이를테면 지금 글을 쓰는 것과 같이 더 의미있는 일이 있다면 '그냥 그것이 좋으니까' 이를 해 나가기도 했다. 해야하지만 할 엄두가 안나던 일들이, 하지 않아도 무방하지만 하면 더 좋은 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나에게 좋은 하루를 고민하고, 또 그보다 더 좋은 하루는 무엇인지를 고민하며 살아가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으면서도 삶의 모든 것을 달라지게 한 관점의 변화다.


참 아이러니하게도 인생의 마일스톤이라 할 만한 것들, 이를테면 결혼, 육아, 저작, 강연, 개원 같은 일들은 무작정 어떠한 목표들을 이뤄야 한다는 강박을 내려놓은 채 '그 자체에 몰입해갈 때' 때 더욱 잘 이루어졌다. 반드시 성취해야 한다는 무리함 없이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그날 할 수 있는 만큼만 최선을 다하는 하루 하루들을 쌓아갔을 뿐인데, 그 하루들이 모여 상상으로는 감히 예측할 수도, 설계할 수도 없는 여러 결과들로 돌아왔다. 일도 사람도 무리함 없이 가능한 최선을 다했을 뿐인데, 오히려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의 변화로 더 이어졌던 것이다. 반드시 달성해야 한다는 부담이 덜어져 오히려 온전히 '진심으로' 몰입할 여유가 생겼기 때문일 것이다.








노력하면 모든 것이 원하는 대로 이루어질까. 나는 그 명제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부동의가 노력의 가치를 냉소하거나 폄하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단지 초점이 달라졌을 뿐이다. 결과보다 과정이 중요하다는 식상한 이야기를 하려는 것도 아니다. 당연히 나 역시 이왕이면 좋은 결과를 기대하지만, 결과가 어떻게 될 지를 염려하는 것 보다 더 가치있는 것을 찾았을 뿐이다. 내게 최선인 오늘에 몰입하고 온전히 그 몰입이 주는 의미와 활력을 느끼는 것, 내게는 가장 중요한 일이자 무엇보다도 큰 행복이다. 그로부터 주어지는 의미와 활력은, 불확실하고 예정되어 있지 않은 결과에 대한 두려움을 견디며 '그저 노력하며' 살아가는 또 다른 힘이 된다.


우리에게 어떤 일은 예상보다 더 좋게 일어나고, 어떤 일은 생각보다 더 형편없이 진행된다. 스스로가 얼마나 열심히였는지와는 무관하게 삶은 그렇게 이루어져 있다. 자연스러운 인생의 원칙이 그렇다면 나는, 노력이 나를 어떻게 배신하였는지를 되새기며 살지는 않겠다. 지금 하고 있는 노력들이 어떻게 나를 배신할 수 있을 지를 미리 예측하며 두려워하는 것은 더욱 원치 않는다.


대신 늘 아침마다 오늘 하루 동안 나아갈 방향을 떠올리고, 하루 만큼만 허락된 걸음을 내딛는 일을 매일 새로이, 그 작심 하루를 평생 반복하고 싶다. 어떠한 결과물을 이루기 위해서가 아니라, 소중한 것들을 머릿속에 품고 이를 향하려 하루를 온전히 몰입하는 '지금 이 순간의 나의 모습이 좋아서' 그러한 나날들을 꾸준히 이어가고 싶다.






우리, 그리고 우리의 인생은 완벽할 수 없다. 아무리 열심히였더라도, 상상했던 결과물이 무조건 주어지지는 않을 수도 있다. 당연하지만 한 번도 당연하지 않았던, 아프지만 자연스러운 그 사실을 받아들이면서 나는 무한히 자유로워졌다. 그 자유란, 바라는 것들이 이루어질 지의 여부와 무관하게 온전히 하루를 나 자신을 위해 쓸 수 있다는 평온함이다. 그리고 이들을 기반으로 내게 허락된 최선의 오늘에 몰입하는 것, 그간의 삶을 통해 나름대로 정의한 진정한 노력의 의미다. 그 자유와 평온, 그리고 진정한 노력의 의미를 당신과도 나누고 싶다.







P.S.


'족보 거부 동기 형'은 잘 지내고 있을까? 늘 안부를 물을 정도로 가깝진 않아 소식을 모르지만 아마 잘 지내고 있을 것이다. 전해 듣기로는 학문에 대한 그의 순수한 열정을 알아보신 미국 모 대학의 교수님 초청으로 연구자로서 이민을 갔다고 들었다. 그에게 어울리는 멋진 소식이었다.


당신의 노력도 당신을 배신하기 보다는, 아마 당신이 예상할 수 없는 방식으로 당신에게 돌아올 확률이 높다. 열정과 진심은 단기적으로 좋은 시험 성적을 보장하진 않지만, 원하는 삶과 행복이라는 장기적인 결과를 유발하는데는 꽤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타인의 진심을 민감하게 느끼고 또 그에 이끌리기 때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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