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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는 정신과 의사 Nov 15. 2022

출근하기 싫으면 불행한 것일까.

불편한 느낌속에 숨어 있는 행복의 비밀



[대구 수성구 범어동 이두형 정신건강의학과]



주 6일제의 진료를 지속하는 것은 고되다. 토요일이 아니면 진료가 어려운 분들이 많아 주말에는 통상 병원이 평소보다 더 붐빈다. 오전 진료라고 해도 오후 2시 까지, 오버타임에 마감 작업을 마치고 집에 와서 식사를 하면 이미 한밤이다. 주 5일제가 당연해진 것도 모자라 주 4일제를 논의하는 사회에서 토요일에 출근을 해야 한다는 자체도 서글프다.


그 틈틈이 글을 쓰고 강연을 하거나 연구회 활동을 이어가는 것도 만만치 않다. 거기에 두 아이 육아가 추가 된다면.. 그래서 요즘 곧잘 듣는 반응이 '그걸 어떻게 다 해?' 이다. 특히 무한한 한량을 지향하던 20대의 나의 모습을 기억하던 친구나 은사님들은 더욱 그렇게 물어온다.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네가 그렇게 산다고?' 란 반응이다.


아마 10여년 전의 내가 지금의 일상을 보낸다면, 삶이 왜 이렇게까지 힘들어야 하는 지에 대해 끝없이 고찰과 자조를 반복하며 불편한 느낌에 젖어 지낼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의 내가 고된 하루를 이어가면서 불행함을 느끼느냐 하면, 그렇지는 않다. 더 없이 피곤한데도 활력이 있고, 졸린 기쁨이 있다. 익숙하지 않은 기쁨과 활력을 미루어, 행복에 대한 조금은 달라진 관점을 느낀다.







과거의 경험을 돌아보면 나는 행복을 '기쁜 느낌' 이 드는 순간이 많은 것으로 정의했었다. 여가 시간이 최대한 많은 것, 공부든 일이든 하기 싫은 일은 최소로 하는 것, 불편한 사람을 만나지 않고 편안한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것 과 같은 느낌이었다.


힘든 것들이 최소화되고 즐겁고 편안한 것이 최대로 되는 것을 지향하던 나는 일년 내내 휴가계획을 바라보며 살았다. 퇴근하기 위해 출근을 했고, 주말에 놀기 위해 주중을 버텼다. 휴가를 가기 위해 업무를 버텼고, 노후 준비를 하기 위해 젊은 시절을 보내는 연속이었다. 싫은 것을 최소화 하고 좋은 것을 최대로 늘리는 것, 당연하다면 당연한 그 원칙을 따라 나름대로 열심히 사는데 왠지 모를 공허함이 밀려왔다.


멋진 여행지 사진들을 뒤져봐도 왠지 그저 그랬다. 유럽은 성당, 북미는 미술관, 한국은 산과 바다 그리고 펜션.. 10여분간 다른 사람들이 멋지게 찍어놓은 블로그 사진을 보고 있노라면 사진으로 봐도 충분하다는 허무함마저 밀려왔다. 답답할 때면 구인 구직 사이트에서 지금 이대로 전공의 생활을 그만두고 뛰쳐 나가면 얼마를 받을 수 있는지, 전문의가 되면 급여가 얼마나 유리한지를 계산하기도 했다. 그 정보를 기반으로 은퇴까지의 자금 계획을 세우다 보면 미래에 대한 안도감 보다는, 인생은 늙어서 서럽지 않기 위해 젊음을 견디는 것이 전부일까 라는 과한 비관이 찾아왔다.


그 때의 내게 결여된 것은 의미였다. 견뎌서 먹고 산다, 멋진 곳으로 여행을 떠난다, 혹은 월급을 쌓거나 재테크를 해서 돈을 번다 와 같이 식상하고 표면적인 명제들 이외에 삶을 지탱하는 것이 없었다. 결여된 의미는 일시적인 쾌락을 추구하고 고통은 피하자는 원칙으로 이어졌으나, 영원한 즐거움은 존재하지 않았고 완전한 고됨의 소멸도 존재하지 않았다. 조금 덜 힘들거나 많이 힘들거나, 그 굴레의 반복이 허무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출근하고 싶다, 공부하고 싶다, 열심히 하고 싶다 라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드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아무리 내가 하고 싶었던 일 또는 중요한 일이라 하더라도, 자연스럽게 마음이 끌리기로는 푹신한 쿠션 베개에 기대어 하염없이 유튜브와 넷플릭스를 넘기는 것만 할까. 그렇다면 나는 하기 싫은 출근을 해야하는 사람이니 불행한 걸까. 그런데 전혀 그렇지 않다.


진료실을 지키는 것은 내게 많은 의미를 준다. 물론 우리 가족이 먹고 살 기반이라는 의미가 가장 크겠으나, 어느 일이 그러하듯 나의 업에도 이 업 만의 소소한 보람이 있다. 단순히 우울증 환자에게 우울증 약을, 불면증 환자에게 수면제를 처방하는 것이 정신과 의사로 살아가는 전부는 아니다. 마음을 치유한다는 것은 70 평생 이렇게 맘 편히 지낸 적은 없다며 우시는 어머님의 이야기를 듣고, 사람을 만나는 게 무서워 집에서만 지내던 청년이 정장을 입고 면접을 다녀온 자랑을 축하하는 일이다. 고단함을 최소로 하고 안락만을 늘리려 하는 가치관으로는 잘 느끼지 못했던, 의미와 가치가 주는 감동이다.


단순히 힘든 것이 많으면 불행하고 편안한 것이 많으면 행복하다고 하기에는 인생의 원리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거나, 오히려 반대로 작용할 때가 많다. 퇴근의 고됨과 출근의 버거움은 불행하게 살고 있다는 증거가 아니다. 오히려 가족의 생계든, 자아의 실현이든 그 피로를 통해 추구하고 싶은 그 이상의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증거다.


피곤에 절여진 날 새벽에 두 세번씩 일어나 안고 어르며 재울때면 '내가 왜 이 고생을 자초했을까' 라는 생각이 나도 모르게 절로 든다. 그러다가도 둘째의 눈을 바라보고 있자면 그런 힘든 것들 쯤은 아무래도 좋을 만큼의 큰 벅참이 느껴진다. 같은 고됨을 선사하던 첫 아이는 어느새 커서 제 두 발로 케이블카를 타고, 안전바를 두 손에 꼭 잡은 채 보이는 것들을 또박또박 신이 나 말한다. 그 뒷모습을 보노라면, 절로 이런 모습을 보는 삶을 살 수 있어서 다행하고 감사하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네 삶에는 쉽고 당연한 쾌락 보다는 이런 종류의 기쁨과 감동이 더 많지 않을까. 꼭 따내고 싶은 공모전에 작품을 출품하려면 긴장과 두려움이 따라온다. 모든 사람들에게 환영 받을 수는 없겠지만, 이를 감내할 수 있다면 나를 깊이 알아줄 새로운 사람을 만날 수도 있다. 달콤한 새벽잠을 조금 양보하면 다른 선생님들과 함께 최신의 의학적 지식을 공부할 수도 있고, 모처럼의 휴일 아이와 놀이동산으로 한 시간 더 일찍 출발할 수도 있다. 두려움과 불편함은 동전의 양면 처럼 삶의 소중한 것들과 맞닿아 있다.







해야할 것이 있고 바라는 것이 있다는 것은 고된 행복이다. 삶에서 지향하는 것, 바라는 것이 하나도 없다면 그렇게 힘들지 않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부처가 아닌 한낱 인간이라서 늘 나름의 의미를 소망하고 그 가치들을 추구하기를 원한다. 그 과정에서 우리들은 생의 소중함을 차근차근 쌓아주는 피곤하고 두려운 것들을 만난다. 그러므로, 궤변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우리의 아픔과 두려움, 긴장과, 피로는 늘 우리가 더 나은 삶을 지향하고 또 이를 충실히 살아내고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그렇게 당신을 위로하고 싶다. 당신이 만약 오늘 불안하고 고단했다면, 그것은 당신이 성실히 또 묵묵히 당신의 삶을 잘 살아내는 중이라는 증거이자, 당신의 삶에서 소중한 것을 길어 올리는 중이기 때문일수도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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