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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는 정신과 의사 Apr 12. 2023

철저히 상관없어 진다는 것

트라우마를 용서하라는 말에 상처받은 당신에게



[대구 수성구 범어동 이두형 정신건강의학과]



트라우마를 경험한 사람들을 공통적으로 힘들게하는 조언들이 들려오곤 한다. 가해자에 대한 용서와 관련된 이야기다. '그를 용서하면 진정한 평화가 온다.' '원망을 내려놓으면 편해진다.' 정말 그럴까.


심적 고통은 눈에 보이지 않아, 이에 대한 세상의 인내심은 무한하지 않다. 처음에는 가해자와 상황에 대해 함께 분노해주지만 아픔이 한 두 달, 심지어 몇 해가 지나도 지속되면 주위에서는 서서히 피해자의 탓을 시작한다. '지금 정도면 잊을 때도 되지 않았느냐, 언제까지 그런 상태로 살 것이냐, 이정도면 사실 네가 문제였던 것이 아니냐.' 그러한 시선은 조급함으로 이어진다. '빨리 좋아져야 해, 아직도 이렇게 힘들다는 건 내가 비정상 이라는 증거야.' 라는 초조함이다.


용서는 어떻게든 좋아져야 한다는 압박이 만들어낸 고육지책의 끝판왕 같다. '차라리 상황을 이해해 봐라, 그 사람을 용서해 봐라'. 그러나 그러한 조언을 들으면 '아하, 그렇게 하면 편안해지겠구나.' 라는 깨달음과 후련함보다는, 그렇게까지 해서라도 어떻게든 편해져야 한다는 부담이 전해진다. 단순한 부담을 넘어, 아픈 것은 나인데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것도 왜 나여야만 하는 지, 인정하기 힘든 슬픔까지 느껴지기도 한다.





아픔을 안긴 이를 죽이고 싶거나 차라리 내가 죽어버리고 싶을 정도의 상처는, 불편하기 때문에 '비정상'인 것이 아니 외려 몇 달, 몇 년이 지나도 아픈 것이 자연스럽다. 어떻게 시간이 지났다고 하여 그러한 사건이 잊혀지는 것이 당연할까. 그 정도의 일이라면 오히려 잊을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 뒤따라오는 불안과 분노는 그러한 아픔을 다시 겪지 않으려는 자연스러운 회피, 방어기제다.


이러한 기전을 애써 외면한 채 일시적으로 힘든 감정을 무마시키기 위한 인위적인 용서를 떠올릴 수록 마음은 '정말 진심이야? 그렇게 하면 괜찮아 지는거야?' 라 되물어온다.


외모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보고 있으면 자신이 기분나빠진다는 이유로 욕설과 폭행을 가한 그를 용서한다는 것이 무슨 말일까. 성적인 자기 결정권을 넘어 한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밟아버린 그를 어떻게, 왜 이해를 해야한다는 것일까. 왜 이러한 고민은 늘 피해자가 하고, 가해자는 해맑게 살아가는 것일까. 그러한 모습을 보면서 혼자서 그를 용서하겠다, 이해하겠다 되뇌이는 것이 정말로 평화를 줄까.


그 기억을 없던 것으로 돌릴 수 없다. 그래야 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기에는 그때의 내가 너무 가엾다. 애써 외면한다고 하여 외면될 것이라면 정신과 의사란 직업은 없어도 된다. 억지로 용서하기로 하면 그렇게 되는 것이었다면 지금까지 이렇게 아파할 이유가 없었다. 비합리적인 수준의 아픔일지라도 그 이유는 비합리적이지 않다.


아름다운 이야기로 애써 덮으려 할 수록 불편한 진실의 아픔은 날카로워진다. 관념으로만 그럴듯한 이야기들을 실제 진료 현장에서 권하기는 어려운 이유다. 그래서 나는 무리한 용서 대신 '그 기억과 철저히 상관없어 지는 것' 을 이야기한다.





트라우마가 삶을 황폐화시키는 기전은 그 자체의 고통도 있지만, 그 이상으로 그동안 내가 소중히 여기던 것들로부터 나를 떼어놓음으로써 이루어진다. 사람이 붐비는 지하철을 탈 수 없어 귀한 면접기회를 포기하고, 웃는 얼굴로 담소를 나눌 자신이 없어 보고 싶은 이를 보지 못한다. 아픔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그로 인해 내가 사랑하던 것들로부터 단절된다. 진정한 트라우마는 외상적 경험 이후의 '영향력'으로 일어나며, 꾸준히 진행된다.


그래서 심리적 외상을 다룰 때 내가 가장 염두에 두는 것은 과거의 아픔이 현재의 소중하고 사소한 일상을 가리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거대하고 압도적인 고통의 기억 앞에서 오늘의 날씨가 마음에 들 때의 포근함, 더운 날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을 물었을 때의 청량함, 기다리던 사람이 먼발치에서 보이기 시작할 때의 설렘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게 여겨진다. 그 '그 따위 것들이 아무것도 아니게 여겨지는' 지점이, 내가 가장 열심히 투쟁하는 지점이다.


나는 당신의 과거를 바꿀 수 있는 능력은 없지만, 그 과거가 현실의 소중함을 앗아가는 지점에 대해서는 당신과 함께 격렬히 저항하고 싶다. 비현실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용서 보다는 차라리 억울함과 분노가 괜찮다. 적극적으로 억울해하고, 가장 솔직하게 분노하기를 권한다. 단지 방향은 조금만 틀면 좋겠다. '왜 그런일이 내게 일어났을까' 라는 분노를 '그 일도 억울한데, 왜 내가 그로 인해 오늘의 소중함 마저도 잃어야 하는가' 로.


그러한 일이 당신의 삶에 존재했다는 이유으로 오늘 읽는 책의 감동이 사라지지 않기를 바란다. 늘 곁을 지켜줬던 강아지의 산책을 이어갈 수 있기를, 언제나 그 앞에서는 울어도 되는 친구와의 약속을 여전히 취소하지 않을 수 있기를 기도한다.


그 아픔의 흔적이 감정적으로나 이성적으로 모두 정리되어야지만 비로소 생의 행복을 다시 추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힘겨운 마음이 들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당신의 삶이, 그 기억과 무관히 존재하고 또 이어지도록 할 것이다. 어떠한 트라우마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당신이 당신이 사랑하는 것들과 접촉하며 살아가길 바란다.


만약 당신과 당신의 아픔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다면, 그 기억이 자꾸만 떠오르고 다시금 마음을 흔들어놓는 현상 자체는 최선을 다해 함께 이해하고 안아주어 갈 것이다. 그러나, 그로 인하여 왜 소중한 일상으로부터 멀어질 밖에 없는지를 이야기하는 어떠한 논리에 대해서도 단호히 거부해 나갈 것이다. '왜 지금처럼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지'를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바라는대로 살아갈 수 있을 지' 를 함께 고민할 것이다.





보란듯이도 잘 살자 라는 것은 아니고, 무리하여 애써 용서하자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단지 내일도 당신의 하루가 열릴 것이다. 그 하루가 그 아픈 기억과는 철저히 상관없는 일상이기를 기도한다. 그 아픔이 있기 훨씬 오래 전부터 일상을 늘 함께하였던 당신이 아끼는 것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들 그리고 그들은 여전히 당신이, 상처를 바라보는 대신 예전처럼 자신을 바라봐주기를 묵묵히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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