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최근 이별을 했습니다. 애도의 과정이 그렇듯 새벽에 심장이 아파서 깨면 공황처럼 느껴지고, 밤마다 통화하며 잠들고, 전화로 논문을 쓰며 상의하고 파일을 주고받던 그 순간이 너무 그리워서 제 방에서 잠을 자지도... 제방 컴퓨터를 키지 못하고 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 나아지겠지 라며 위로하기엔 저에게 근본적인 '문제'가 있어서 몇 자 적어봅니다.
저는 생각보다 나이가 있는 30대 여자로서 나이에 비해 연애경험이 많지 않습니다. 저는 외동이기도 했고, 아버지가 불안장애가 조금 있으셔서 친구들과 놀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저의 첫 사회경험인 유치원에서 부터 인기가 없었고, 유치원 첫 생일잔치에서는 누군가 선물을 주었지만 2분 뒤 이름을 착각했다며 뺏어가 버리더군요 ^^;; 그 뒤로 저는 물건 값이 중요한 게 아니라 사람에게 받는 '선물' 혹은 애정표시에 집착을 했던 것 같습니다.
(... 중략 ...)
원래도 심리관련 학문을 좋아하고, 석사를 하면서 많이 깨달은 탓에 교우관계가 좋아지고 부모님도 용서하게 되면서 마음이 한결 나아졌습니다. 논문학기에 실험이 몇 번이고 좌절되면서 자살까지 생각할 정도로 힘들 때 오늘의 주인공 남자 분을 만나게 되었고, 제 인생 처음으로 저 보다 높은 학식과 배울 점이 많은 그리고 성실하게 저를 챙기는 모습에 안심했습니다.
연애 시작 초반에 이 분을 보며 혹시 이분도 성격장애가 있는 분이면 어쩌지.. 걱정을 많이 했지만 아까 말씀 드렸듯 저는 논문이 너무 중요 했고 교수님 말씀 하나에 무너지고 힘들어 할 때마다 먼저 졸업한 경험자로서 조언을 하는 그를 보며 전 여태껏 느껴보지 못한 감정을 느꼈습니다. 사실상 부모님, 남자, 친구 모두 저에게 조언을 구하고 어른의 프레임만 씌웠는데 이분이랑 있으면 제가 온전히 의지할 수 있다는 생각에 저는 점점 더 어린아이가 되었고, 유약해져만 갔습니다.
저는 왜곡된 인지이겠지만 살면서 '촉'이 굉장히 좋은 편인데(꿈도 자주 맞고, 98%이상 예감이 오면 신체화 증상이 나타나고 나쁜 일이 일어납니다. 앞서 말했던 바람났던 남자들의 증거도 그렇게 잡기도 했구요 ㅠㅠ)
그러던 중 데이트를 하면 남자분이 화장실에서 지나치게 늦게 나오는 모습을 보며 이전 남자들처럼 화장실에서 다른 여자와 몰래 전화하느라 그런 건가.. 의심은 계속 들었고 저는 남자 분께 너무 힘들다며 헤어지고 싶다는 장문의 문자를 자주 보냈습니다. 그때마다 잡아주는 그를 보며 안심 했던 것 같아요.
(...중략..., 남자분과 다른 여성이 가까워질까를 고민하고 갈등을 빚다 이별하는 내용> 개인정보가 드러날 우려가 있어 생략합니다.)
그 뒤로 공황증세가 와서 제방에서 잠도 못자고 밥도 못 먹었습니다. 문자로 이미 헤어지는 것으로 결론이 났었는데 왜 다시 전화가 왔고... 두 시간 동안이나 전화를 하다 헤어지자고 했는지 납득이 가지 않아서 괴로웠습니다. 제가 나이가 많아서 버린 걸까. 나는 본인 취준생 일 때 기다렸는데... 왜 내가 현재 취업을 준비할 때는 기다려주지 않았을까 원망을 무척했지만 정상적인 남자가 일방적으로 받기만 하려는 여성을 먼저 전화 문자조차 하기를 겁내하고 사귀기 전엔 농담도 잘하고 튀는 매력이 있던 그녀가 사귀고 나자 갑자기 어린애로 돌변해서 매달리는 게 너무 버거웠을 것 같았습니다. 본인도 그러더군요. 자기가 여자를 사귀면서 이렇게 "의지"를 못해본 적이 처음이라고요... 너무 가슴 아팠습니다. 늦은 나이에 학교 공부를 재도전해서 다시 취업 준비를 하는 괴로운 과정에 연인까지 상실 하니 어디서부터 고쳐야 할지 막막합니다.
분명 저는 과할 정도로 도전적이고 (중학교 때부터 혼자 오디션 보러 다니고 음악에서는 드물게 대학 입시도 스스로 준비 했습니다. 해외여행도 혼자 잘 다녀옵니다) 거침없는 성격이었는데 왜 친구 관계나 특히 남자와의 관계에서는 수동적으로 아무것도 못하는지.. 그리고 바람 필까봐 겁나서 늘 그것만 예의주시하고, 겁이 나면 전화라도 해보고 감시라도 하면 될것을 그렇게 하지도 못한채 혼자 방에서 울고만 있는 제 자신이 답답합니다. 다시 만나면 이전에 못했던 저의 진심, 사랑의 표현, 먼저 전화하기.. 문자하기 등 사소한 것이 너무 하고싶습니다. 너무 그립습니다. 새벽만 되면 왜 다시 전화왔었을까? 내가 무슨말을 잘못했길래 마음이 돌아서서 이별을 고한걸까? 다른 여자가 생긴거였을까 생각을 멈추지 않는 꼬여버린 제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지금 가장 중요한게 취업인데.. 이렇게 비합리적인 생각만 하는 저를 멈추고 싶습니다. 너무 길게 와버렸네요. 두서 없는 글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두두의 마음편지)
안녕하세요.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이두형 입니다.
진심으로 사랑했던 누군가와 헤어진 아픔은 어떠한 격려나 따뜻한 말로도 위로되지 않을 때가 많은 것 같습니다.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지금이 아니더라도 혹여 어느 시점엔가 글쓴이님께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기를, 그리고 글쓴이님이 원하시는 사랑과 행복으로 나아가시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 조심스레 글을 써 봅니다.
누군가에게 사랑에 빠질 때 이유가 없는 것처럼, 헤어짐에도 정해진 알고리즘은 없습니다. 그 때 그런 말을 하지 말았어야 하는데, 그 때 조금 더 상대방을 배려했다면 좋았을 텐데 와 같은 몇몇 단편적인 일화들로 이별의 모든 이유를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한 사람의 삶과 마음은 너무도 복잡하고 변수가 많아서 우리는 이를 모두 통제해낼 수 없고, 마치 우주와 같은 두 사람의 마음이 만나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별에 대해 ‘인연이 다했다’ 고 표현하며, 이는 사랑을 시작하는 것만큼이나 자연스러운 일이자, 만남의 과정이며 일부입니다. 우리는 종종 누군가가 부족해서 이별을 맞이했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우리 모두가 누구나 불완전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누군가를 만나기에 앞서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해 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나는 만남을 무엇이라고 생각하는 지, 혹 만남을 길고 긴 불안과 슬픔의 유일한 구원으로 생각하고 있진 않는지, 나는 만남만큼이나 이별을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받아들이고 있는지.’
글쓴이님이 적어주신 글을 천천히, 여러 번 반복하여 읽어 보았습니다. 그리고 글쓴이님께서도 짐작하시듯, 글 속에 공통되는 마음의 과정이 있음을 느꼈습니다. 그것은 ‘둘이 되면 안도하는 마음’ 과 ‘다시 하나로 돌아갈 까봐 두려운 마음’ 입니다.
우선 글쓴이님께서는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지 않는 상태를 어딘지 모르게 ‘불완전한 상태’ 로 느끼시는 건 아닌가 합니다. 마치 어린 아이가 부모로부터 떨어지면 심한 두려움을 느끼는 마음입니다. 아마 말씀해 주신 어렸을 적 경험들, 그리고 나 자신도 알지 못하는 깊은 마음 속 경험들과 이러한 경향성이 연관이 있지 않을까 생각이 되지만, 중요한 것은 그 원인을 이해하는 것 보다 지금의 내 마음 그 자체를 깊이 이해하고, 이를 고려하며 내가 원하는 삶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이러한 마음은 새로운 누군가를 만나게 되었을 때 다음과 같이 작용할 수 있습니다. 우선 나의 외로움을 채워 줄 대상이라는 생각이 들면, 누군가에게 쉽게 호감을 가질 수 있습니다. 또한 여러 가지 따뜻함과 장점에도 불구하고 나의 허전함을 충분히 채워줄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면, 예컨대 겉으로 드러나는 카톡이나 전화 횟수, 내게 호감을 표현하는 정도가 부족하다면 그 사람을 멀리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만약 내 마음이 홀로 있는 시간들을 어려워한다는 걸 인식한다면, 누군가에게 급격히 마음이 기우는 것도 경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눈앞의 상대방이 정말 마음에 들고 사랑스러울 수도 있겠지만, 본디 내 마음 안에 해결되지 않은 외로움, 허전함이 많다면 ‘나를 외롭지 않게 할 가능성이 큰 사람’에게 급격히 마음을 줄 가능성이 많겠지요.
사랑하는 이를 만날 때 나를 외롭지 않게 둘 사람인지를 생각해 보는 것이 꼭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러한 마음으로 인해 누군가를 객관적으로 보지 못할 가능성, ‘내 마음이 그리고 바라는 대로’ 상대방을 보고 평가할 가능성이 있음을 생각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다시 하나로 돌아갈 까봐 두려운 마음’ 에 대해 이야기를 해 보겠습니다. 홀로됨이 불안하고 허전해하는 마음이 깊다면 누군가와 특별한 관계가 되었을 때 그러한 외로움이 해결된 듯한 느낌으로 인해 큰 안도감을 느낍니다. 그러나 이는 일시적일 뿐 지속되지 않습니다. 이러한 공허함은 내 마음 깊은 곳에 뿌리내려 있어 궁극적으로 ‘타인으로부터 충족될 수 없는 마음’ 이기 때문입니다.
이성과의 관계는 세상 다시없을 특별함으로 시작하여 점차 평범함을 향합니다. 우리는 누구나 부족하지만 사랑에 빠진 상대는 처음에는 완벽하게만 느껴집니다. 그러나 만남을 지속하며 처음에는 보이지 않던 상대의 단점을 알아차리기 시작하고, 이는 상대방도 마찬가지 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에 대한 마음을 더욱 깊이 알아가면서, 처음에 얕지만 이상적으로만 보였던 관계는 점차 평범하지만 깊은 관계로 짙어집니다.
누군가와 늘 함께하고픈 마음이 큰 사람에게 이상적인 사람이란 ‘결코 나를 떠나지 않을 사람’ 이겠지요. 그러나 세상에는 완벽한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결코 나를 떠나지 않을 사람도 실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함께 하는 것이 행복할 때, 혹은 시련이 밀려와도 함께 헤쳐 나가고 싶은 마음이 지속될 때 두 사람의 만남은 이어지는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만남이 종결될 뿐입니다.
설사 누군가와 남은 삶을 끝까지 함께하게 되더라도, 현재의 시점에서 우리의 인연이 영원히 지속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그러나 홀로 되는 것이 지나치게 두려운 마음은 끊임없이 상대방의 마음이 변하지 않을 것인지를 확인하려 합니다. 연락이 되지 않을 때의 상대방의 행적을 궁금해 하고, 혹여 다른 사람에게 마음을 빼앗기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다른 이성과의 만남을 차단하려 합니다. 내가 알지 못하는 상대방의 마음의 영역이 있는 것을 두려워하고, 그의 모든 깊은 마음을 파악하려 합니다. 혹은 글쓴이님이 그러하셨듯 이러한 마음이 드러날까 봐 오히려 속으로만 끙끙 앓을 수도 있겠습니다.
이러한 경향성이 옳고 그른 지를 논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연인으로서 어느 정도 까지는 당연한 권리라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러한 경향성이 실제 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 지입니다. 어떠한 사이라도, 심지어 부부사이라 하더라도 특정한 한 사람과의 관계가 한 사람의 인생의 전부일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누구나 자신만이 아는 마음이 공간이 필요합니다. 지나치게 상대방의 마음을 깊이 들여다보고 그가 나를 떠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을 가지려 하는 시도들은 상대방에게 구속으로 느껴질 수 있고, 그 자체로 관계를 멀어지게 할 소지가 있습니다.
그러니 글쓴이님께 다음과 같은 말씀을 전해드리고 싶습니다.
사랑은 게임과 달라서, 어떠한 상황 마다 옳은 선택지를 해야 지속할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깊고도 변수가 많아, 스스로의 마음, 그리고 만남을 처음부터 끝까지 통제할 수 있는 사람 역시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만남만큼이나 이별 역시 이유를 알 수 없고, 또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떠나간 이와의 기억에서 후회됨을 떠올리는 것은 잘못된 것은 아니나, 그 방향이 ‘어째서 이별이 일어났는지를 납득하지 못하는 이유’ 를 추가하는 것이 아니라, ‘다음에 만날 누군가와의 관계를 어떻게 더 행복하게 보낼 지’ 를 고민하는 것이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누군가를 만나기에 앞서, 내 마음 안에 ‘홀로됨을 견디기 힘들어 하는 마음’ 이 숨어있는 건 아닌 지 돌아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그리고 만남을 시작했다면, ‘다시 홀로됨을 두려워하는 마음’ 이 상대방과의 관계를 어렵게 만드는 것은 아닌지를 살펴보시면 좋겠습니다. 그와 같이 있지 않은 시간에는 이 관계가 지속되지 못할 까 두려워하는 마음을 조금만 다독이고, 그 대신 이 시간을 ‘그와 독립된’ 나만의 시간으로 채워가려 노력하시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와 함께 하는 시간을 ‘그가 앞으로도 나와 함께할 지를’ 고민하고 확인하며 보내는 대신, 온전히 ‘지금, 여기’ 에서 그와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데 몰입해 보시기를 권해드리고 싶습니다.
힘든 시간들 속에서 혼란하다면, 판단이 잘 서지 않는다면, 한 가지 방법을 알려드리고 싶습니다. 마음속에 지금 내가 떠올릴 수 있는 가장 현명한 사람을 떠올려 보세요. 친구, 가족, 가깝진 않지만 존경하는 사람, 누구도 괜찮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나와 아주 가깝고 나를 아끼는 사람이라고 상상해 보세요, 그가 지금의 내 상황과 나의 마음을 듣는다면, 나에게 어떤 이야기를 건넬까요? 나의 관점을 벗어나서 지극히 현명하고 자비로운 그 사람이 건네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보시는 것이 도움이 될 지도 모르겠습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축복과도 같은 멋진 일입니다. 그러나 이는 삶의 필요조건일 뿐 충분조건은 아닙니다. 우리는 살아가며 많은 멋진 일들을 경험하게 되고, 사랑은 그 중 하나입니다. 그러니 누군가와 함께 하지 않을 때는 나만의 삶을 온전히 보내시기를, 그러다 또다시 누군가와 운명적인 사랑을 시작한다면 그 끝을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만남 그 자체에 감사할 수 있는 관계를 이어가시면 어떨까 합니다.
편지에 못다 적은 말들이 담긴 글을 함께 공유 드립니다. 글쓴이님의 앞날에 따스함이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