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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을 믿지 못하겠어요.

두두의 마음 편지

by 아는 정신과 의사


올리시는 글들을 보며 많이 공감하고 또한 위로도 받고 하는 독자입니다. 그래서 감사한 마음도 크구요^^

글을 읽을 때마다 제 이야기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불쑥불쑥 들곤 했지만 늘 주저하다가 오늘은 이야기 드려보고자 합니다.


저는 외현적 으로는 특별할 것 없이 일반적이고 무난하게 살아가는 듯 합니다. 그런데 일상에서 순간순간이 버겁기도 하고 제 성격에 여러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스스로 생각되는 여러 문제들이 있지만 지금 이야기하고 싶은 건 사람을 믿지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가까운 사람이든 일적으로 만나는 사람이든 저를 만만하게 보거나 혹은 뒤에서 흉을 보거나 더 나아가 제게 사기를 치려한다고 느껴집니다. 그래서 사람들과 일적으로든 사적으로든 마주치는 상황이 발생하는 게 싫고 그런 상황에서 상대의 말이나 행동에 무척 예민해지고 신경과민이 됩니다. 그러면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게 되서 그 상황을 회피하고 싶거나 혼자 동굴 속으로 들어가고 싶어지고 모든 걸 내려놓고 싶어집니다.


주변인들에게서는 말이나 사고가 논리정연하고 날카롭고 잘 꿰뚫어본다는 말을 듣습니다. 제가 생각해도 그런 면이 있어서 상대의 말이나 행동에 조금이라도 모순이 보이면 그게 저를 속이고 기만하려는 단초로 여기는 것 같습니다. 그런 부분들을 남들보다 더 잘 캐치하기도 하구요. 그런데 또 지난 일들을 보면 실제로도 종종 그렇게 속임(?)을 당한 일도 있어서 더욱 그런 성향이 굳어진 것 같습니다.


일상생활에서도 소소하게 사람을 믿지 못하지만 이성관계에 있어서 상대에게 호감을 느낌과 동시에 상대를 믿지 못하여 심하게 괴로워하곤 합니다. 믿지 못함의 가장 큰 양상은 '상대가 나를 잠깐 가지고 놀려고 한다, 그냥 만만하게 집적거려본다'라는 의심이 드는 것입니다. 사실 예전에 회사에서 양다리를 걸친 동료에게 크게 상처를 받고 깊은 우울감에 빠진 적도 있구요.


마음 깊은 곳에 사람을 믿지 않으니 계속 혼자만 지내고 싶고 생활에서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것 자체가 싫습니다. 그런데 또 여행지에서 만나는 사람들이나 낯선 이들에게는 쉽게 말을 걸고 상냥하게 대화도 잘 합니다.


이런 성향이 있어도 사회생활에 표면적인 어려움 없이 그럭저럭 잘 지냈지만 나이가 들수록 사람들이랑 부딪히는 일들이 싫습니다. 특히 조금이라도 갈등이 생길라치면 그와 관련된 걸 무조건 회피하고 싶은 욕구가 점점 커지는 게 느껴집니다. 이런 스스로의 성격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다스려가며 살아야할까요?


(추가로 말씀드리자면 어릴 때 얼굴에 수술을 했는데 문제가 있어 흉터를 가지게 되었고 어린 시절에 그 때문에 놀림이나 수군거림을 많이 듣고 자랐어요. 그게 마음에 오랜, 깊은 상처로 남아있기도 하구요. 더구나 부모님이 그 흉터가 제가 넘어져 다친 상처라고 말씀하셔서 어렸을 때 어떤 죄책감 같은 걸 가지고 살다가 사춘기에 그게 아닌 걸 알고 상처를 받기도 했습니다. 그런 상처들이 아직 마음에 남아있기도 한 거 같이요.)




두두의 마음 편지)


안녕하세요.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이두형 입니다.


저는 정신과 의사로 면담을 하면서 그런 생각을 합니다. 한 사람의 마음은 어쩌면 우주보다도 더 깊은 건 아닐까, 그 속이 너무도 깊고 또 심오해서, 그리고 복잡다단해서 스스로의 마음조차 살면서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닐까, 그러니 나의 마음을 거쳐서 바라보는 타인의 마음은 더더욱 이해하기 힘든 것이 아닐까.


우리는 세상을 나름의 체계로 범주화하여 바라보는 것을 좋아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것을 좋아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옳고 그름, 좋음과 나쁨, 맞고 틀림 과 같은 이분법적인 사고로 세상을 재단합니다. 관계에서도 이러한 경향이 종종 나타나지요. 착한 사람과 나쁜 사람, 믿을 수 있는 사람과 믿지 못할 사람 등의 범주가 우리의 마음속에 흔히 존재합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너무도 많은 사람이 존재하고, 같은 수의 마음들이 존재합니다. 그 수많은 사람들을 일괄적으로 분류할 수 있는 범주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를 평가할 가치관이 개개인마다 모두 다르기 때문이고, 한 사람의 마음조차 늘 변화하기 때문입니다. 어릴 적 나와 지금의 나는 분명 같은 사람이지만 생각과 가치관, 마음이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같다고 할 수는 없겠지요. 단지 우리는 우리의 마음속에 갇혀서 타인을 어렴풋이 더듬어 볼 뿐이며, 나와 잘 맞지 않는 지, 그렇지 않은 지 정도를 어렵게 가늠해 볼 따름입니다.


글쓴이님의 내면에는 타인을 ‘믿을 수 있는 사람’ 과 ‘믿지 못하는 사람’으로 나누는 마음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믿을 수 있는 사람’의 범주를 온전히 만족시키는 사람이 드물고, 이러한 사람들을 대할 때 많은 불편함을 느끼며 이를 회피하고픈 마음이 많으신 것 같습니다.


그러한 마음 아래에는 어떤 마음이 있을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혹 ‘사람은 대개 믿을 수 없는 존재다.’ ‘믿을 수 없는 사람은 언젠간 배신할 수 있고 결국은 내게 크나큰 상처를 남긴다.’ 라는 생각이 깊은 뿌리를 내리고 있진 않을 지요. 적어주신 이유로 인해, 혹은 짐작하지 못하는 무의식 속 다른 이유들, 그리고 살아온 삶의 경험들이 모여 그러한 생각을 형성하였을 것 같습니다.


그러한 마음이라면, 그리 깊이 맺어지지 않을 관계에 대해서는 그다지 큰 두려움이 생기지 않겠지요. 여행에서 만났고 곧 헤어질 사람, 거래처에서 가끔 마주치는 사람 같은 스쳐가는 인연들이라면 내게 큰 배신과 그로 인한 아픔을 안겨줄 만큼 깊고 또 오래된 관계가 애초에 형성되지 않을 테니까요.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그 생각이 맞고 틀린지, 어째서 타인을 믿지 못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원인이 무엇인지, 혹은 그러한 생각이 잘못되었으니 어떻게 고쳐야 하는 지에 대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한 생각은 (비록 많이 불편할 지언정) 아마도 사연자님의 삶 속에서 자연스럽게 녹아나온 것일 것이며, 스스로가 다시금 과거의 아픔을 반복하고 싶지 않은 자연스러운 마음의 발현일 것입니다.


그 마음은 비난 받을 필요도 없고, 물론 사연자님도 잘못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저 아픔을 피하고 행복을 얻고자 하는 지극히 당연한 마음에서, ‘함부로 사람을 믿지 말고, 마음을 열지 말자’ 는 방법을 택하셨을 따름입니다.


단지 다음 두 가지에 대해서는 함께 생각을 해 보면 좋겠습니다. 우선 첫 번째로 ‘사람은 기본적으로 믿기 힘든 존재다.’ ‘깊은 관계를 맺은 사람은 언젠가는 내게 상처를 줄 가능성이 있다.‘ 라는 생각이 얼마나 믿을 만 한 지에 대한 부분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이성이 감정에 영향을 받는 다는 사실을 종종 간과합니다. 아마 사연자분께서도 살아오시며 ’실제로‘ 사람에게 상처를 받은 경험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한 경험, 특히 어린 시절부터 각인되어 온 경험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또다시 상처를 받을 까 두려워하는 마음을 불러올 수 있습니다.


평소라면 넘기기 힘든 일도 기분이 좋을 때는 웃으며 넘길 수 있고, 또 반대로 마음이 우울하거나 불안할 땐 작은 일에도 부정적인 생각이 드는 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부정적인 생각과 감정은 서로 연결되어 있고 또 상호작용을 합니다.


어느 시점부터 사연자분께서는, 타인을 만나는 그 자체에서 불안과 두려움을 느끼셨던 것 같습니다. 그럴 때 마음은 그 불안에 상응하는 생각들, 이를 테면 ‘이 사람은 믿을 만한 사람일까?’ ‘이 사람 역시 나와 관계가 깊어지면 나를 배신하고 내게 상처를 주는 건 아닐까?’ 와 같은 생각을 만들어내고, 이러한 생각은 다시 불안을 가중시킵니다. 악순환의 고리 끝에 이러한 관계 자체들을 애초부터 피해버리고 싶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러나 과거와 달리 현재의 관계에서, 이러한 마음, 이러한 경향성은 누군가가 ‘지금’ 내게 실제로 한 잘못, 배신에 대한 반응이라기보다는 이미 내 마음에 ‘과거로부터’ 세팅된 불안감에 가깝습니다. 이는 미리 불안이라는 색으로 물든 안경을 쓰고 타인을 바라보는 것과 같습니다. 이미 내 마음에 그러한 경향성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타인에 대한 불신으로 불안감이 밀려올 때, 실제로 그 사람이 얼마나 믿을 만 한지, 그렇지 못한지에 대한 생각으로부터 한 발짝 벗어나 ‘그러한 생각이 얼마나 믿을 만 한지’ 에 대해 생각을 해 보시면 어떨까 합니다.


두 번째로, 지금 내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 다른 사람을 믿지 못하겠다는 생각 그 자체인지, ‘이러한 생각을 바탕으로 내가 타인과의 관계에서 행하는 행동’ 인지에 대해 한 번 생각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내 마음 속의 생각은, 생각인 상태만으로는 내 삶에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 생각으로 인해 택하는 행동들이 내 삶을 변화시키고 또 이끕니다. 예컨대 그러한 생각을 바탕으로 충분히 오래도록 만나온 사람에게도 깊어진 관계만큼 마음을 열기 힘들지도 모르고, 나는 타인을 늘 재단하고 평가하게 될 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타인이 겉으로 드러내는 모습 아래 숨은 마음을 고민하기에, 상대방의 입장에선 들키지 않은 속마음까지 들추어지는 느낌을 받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행동이 틀렸다거나 잘못이라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러한 방법, ‘타인이 배신할 까봐 두려운 마음이 들 때면 회피를 하는 방법’ 이 ‘실제로 내 삶에 행복을 가져다주고 있는지’를 함께 고민해 보고 싶은 것입니다. 우리는 힘든 마음이 찾아오면, 이를 피하는 행동으로 이어지는 것이 저절로 이루어지고 또 당연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불안을 피하는 것이 내게 좋을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내가 택하는 행동‘ 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행동은 실제로 단기적으로는 불안을 회피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관계에는 감정적 교류, 경제적 연대, 작은 위로와 소소한 즐거움 같은 우리의 행복에 꼭 필요한 요소들이 가득합니다. 회피는 이 모든 요소들로부터의 멀어짐을 의미합니다. 또한 회피를 하면 할수록 타인은 믿을 수 없다는 생각은 강화됩니다. 깊은 관계 속에서 ‘실제로는 믿을 만한 사람도 있구나’ 와 같은, 나의 생각과 반대되는 결과에 접촉할 기회를 잃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하느냐 물으신다면 정답은 없겠습니다. 다만 제 자신이 타인을 대하는 마음을 전해드릴까 합니다.


‘우리가 함께 하는 것이 우리 모두에게 행복이라면 억지로 멀어지려 해도 이 관계는 이어질 것이고, 둘 중 하나라도 불행이라면 억지로 가까이 하려 해도 멀어질 거야.’


‘지금 이 사람이 곁에 있다는 것은 감정적으로든, 경제적으로든, 사회적으로든, 어떠한 이유로든 우리 서로에게 행복이라는 의미겠지. 감사한 일이야.’


‘그리고 우리가 멀어진다면, 이는 둘 중 하나가 배신해서라기보다, 둘 중 하나가 너무 나쁜 사람이라서 라기보다는, 더 이상 함께하는 것이 나와 너, 둘 중 하나에게는 행복이 아니어서 겠지. 기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자연스러운 일이야.’


그렇게 생각을 하다보면, 곁에 있는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평가하고 재단하는 대신, 함께 보내는 시간, 함께하는 일들에 더욱 마음이 기울여집니다. 제가 그 사람에게 구태여 좋은 사람이 될 이유도 없으니 무리한 요구를 들어줄 일도 없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마음과 방향이 정답이라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제게는 이러한 마음이 많은 평안과 기쁨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그래서 사연자분께도, 함께 하시는 누군가가 '어떤 사람인지, 얼마나 믿을 만한 사람인지' 에 대한 생각에 몰입하고 그를 평가하기 보다는 그 사람과 '함께하는 이유가 무엇이고, 어떤 시간을 함께 보낼 것인지' 를 고민해 보시면 어떨까, 조심스레 제안을 드려 봅니다.


편지가 길어졌습니다. 관계에 정답은 없고, 홀로 지내는 것이 잘못된 것도 아니라 생각합니다. 다만 내 삶과 내 행복에 타인과 함께하는 것이 중요하다면, 관계에서 '어떻게 하는 것이 배신당하지 않는 길인가' 의 기준 대신 '어떻게 하는 것이 나에게 행복인가' 의 기준으로 살아가 보시면 어떨까 합니다. 아무쪼록 작은 도움이 되셨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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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pixab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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