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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는 정신과 의사 Oct 07. 2018

그건 네 잘못이 아니었단다.

상처받은 어린 내게 보내는 편지; 유년기의 트라우마 (trauma)

 (사진 출처: https://pixabay.com)


 송아지는 출생 10여분 만에 뛰어다닌다생존을 위한 절박한 움직임이 태어날 때부터 입력되어 있다반면 사람이 자립하기 위해서는 상당 기간의 신체적심적 성장이 필요하다고도로 세분화된 사회를 살아가는 인간은 충분히 안전한 환경 하에서 천천히 성장한다아이가 홀로 살아남기 위해서는 일정 시기 동안 일정 정도의 보호가 필요하다이는 부모의 호의가 아니라인간의 숙명이다.
  
 몸통에 비해 큰 머리와 짧은 팔다리부드러운 각도의 턱관절얼굴에서 큰 비율을 차지하는 눈 크기 등 포유류의 새끼들은 공통된 외형을 보인다아기 포메라니안 강아지나요즘 인기 있는 짱절미의 모습을 떠올려 보자하얀 솜뭉치 같은 앙증맞은 몸에 순수하게 검은 눈동자와 코가 점점이 박혀 있다데굴데굴 구르듯 돌아다니다주인과 눈이라도 마주칠라치면 이내 덤벙덤벙 달려온다심 쿵품안에 넣고 부비고 싶다연약한 강아지가 살아갈 수 있게 해 주는어린 것을 향한 성인의 자연스런 느낌이다.
  
 아기는 생후 3개월가량 이면 생긋 생긋 웃는다평생의 효도를 2살 전에 모두 한다는 이야기가 있다존재만으로도 심장을 멎게 만드는 아가가눈을 마주쳤다는 이유만으로 미소를 짓는다. 시간이 정지하는 듯한 그 장면 하나 만으로 모든 삶을 아이를 위해 쓰고 싶다는 마음이 든다사회적 미소 (social smile), 미소 반응 등으로 칭하는 이 웃음에도 생존의 비밀이 담겨 있다부모혹은 자신을 보호하는 이와하나뿐인 특별한 사랑을 나누는 것이 아이의 삶을 이어준다웃어주기에 우유를 먹을 수 있다거나우유를 먹여주기에 웃어주는 것이 아니다본능적으로 아기는 보호자를 반기고부모는 아기를 보듬는다숭고한 삶의 이치다사람은 송아지처럼 태어나자마자 홀로 뛰어다닐 수는 없다그렇기에 특별한 교감과 보호아래자립할 때 까지 성숙해 간다.
  
 보호와 생존의 연결고리를 아이는 본능적으로 인식한다그렇기에 어린아이에게마음의 위협두려움은 불편함이나 불쾌함이 아니라 생존의 위협이다문제는 이미 위협과 두려움은 지나갔으되그 흔적은 남아 끊임없이 자신을 괴롭힌다는 것이다.

 ‘... 어느 날 스물여덟 살인 간호조무사 한 명이 펠리티의 진료실을 찾아와 자신에게 비만은 가장 큰 문제라고 호소했다. ... 185kg이던 그녀의 체중은 51주 후 60kg으로 확 줄었다.’
  
 ‘그런데 몇 개월 지난 뒤 다시 만났을 때펠리티는 그 간호조무사가 다시 체중이 불어났다는 사실을 확인했다게다가 불어난 수준은 그토록 짧은 기간에 일어난 일로는 도저히 믿기 힘들 정도였다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알고 보니 감량에 성공한 뒤 날씬해진 몸매에 반한 남자 동료가 치근대기 시작하더니 관계를 하자고 제안했다는 것이다그런데 그 말을 듣고그녀는 집에 돌아가서 음식을 먹어대기 시작했다하루를 꼬박 먹고밤에 자다가 몽유병 상태로 또 먹었다펠리티가 이 극단적인 반응이 어디서 나왔는지 조사해 보니 그녀는 할아버지에게 장기간 성폭행 당한 적이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그 여성은 비만 수술을 받고 체중을 44kg 이나 감량했지만 그 사이 자살을 시도했다고 말했다그리고 자살 충동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신의학 병원 다섯 곳을 전전하며 전기 충격 치료 프로그램을 세 번이나 받았다고 설명했다.’
  
 '성폭행 피해자인 한 여성은 펠리티에게 이렇게 말했다. “체중이 많이 나가면 눈길을 안 받잖아요저한테 필요한 게 바로 그거에요.”’
  
 (베셀 반 데어 콜크몸은 기억한다 을유 문화사. 2016)
  
 아주 어린 시절의 일들은 보통 잊혀 지거나미화되는 것으로 치부되기 쉽다하지만 마음의 깊이는 기억의 공간 이상으로 깊다살아가며 기억할 것들이 많기에 자리를 내 줄 뿐상처들은 보이지 않는 어두운 바닥에 침잠하여 감정으로생각으로행동으로 삶에 영향을 미친다더군다나 그 상처가 생존을 위협하고살아가는 것조차 두렵게 만들 정도였다면 더욱 그렇다.
  
 한 실험에서 개를 묶고 전기 충격을 가했다깜짝 놀란 개가 달아나려 하지만목에는 쇠사슬이 매어 있다반복적인 도망이 무위로 돌아가자개는 이윽고 체념한다전기 자극이 주어져도 더 이상 달아나려 하지 않았다안타깝게도쇠사슬이 풀어진 이후에도.
  
 코끼리를 길들이는 과정은 퍽 잔인하다어미로부터 떼어낸 아기 코끼리를 묶어 두고구타하거나 칼로 몸에 상처를 내며 학대한다그리고 사육사의 통제를 벗어날 때마다 관자놀이 부근을 막대로 피가 날 때 까지 때린다이러한 환경 아래에서 자란 코끼리는 이 막대에 속박된다거대한 코끼리는 발걸음 한 번으로도 사육사를 제압할 힘이 있지만죽을 때 까지 막대의 통제를 받는다.
  
 성숙한 성인은 홀로 살아가며 세상에 대처할 수 있다하지만이어지는 전기 충격에도 자리를 떠나지 않는 안타까움처럼당당한 삶을 살아가는 이도 라우마에는 무력한 경우가 많다아픔을 겪는 그 때의 내가 마음속에 자리 잡아마치 아물지 않는 흉터처럼 아픔과 두려움을 반복하여 겪는다.
  
 그리고 아이들은 두려운 상황의 원인을 자신으로 인식한다흔히 아이 앞에서 부부가 싸우는 모습을 보이지 말라는 조언을 한다자신을 중심에 두고 생각하는 아이는 자신이 다툼의 원인인 줄 알기 때문이다. ‘엄마를 화나게 해서 미안해요내일은 꼭 말 잘 들을게요물을 엎지르지 않을 게요...’ 학대 속에 짧은 생을 마친 (꼭 아름다운 곳에서 행복하길 빈다.), 또래 아이들의 몸무게의 반 밖에 나가지 않은 일본의 4세 여자 아이가 남긴 쪽지다
  
 아이의 글을 읽고 안타까움과 분노가 들었다높은 조회 수와 댓글의 내용 들을 통해 많은 이들도 비슷한 감정을 느꼈음을 알 수 있었다누가 봐도 아이는 잘못한 것이 없다당신에게도 어린 시절의 말 못할 아픈 상처가 있다면마찬가지로 당신은 잘못하지 않았다.
  
 다음의 한 줄 이야기를 건네고픈 마음에긴 서두를 썼다혹 그 때의 기억이 되살아나고그 때의 두려움으로 눈물짓는 이가 있다면꼭 이야기해 주고 싶다
  
 이제는 괜찮단다.
 지금의 너는 너로서 충분하단다.


 그리고그 아픔들은 결코 너의 잘못이 아니었단다.
  
 여전히 마음 속 깊은 곳에떠올리기조차 두려운 그 때에 머무르며 쪼그려 앉아 울고 있는 아이가 있으신지깊은 밤 조용히 어른이 된 지금의 모습으로 그 옆에 앉아 어깨를 다독여 주시기를 바래본다.



  
*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 가 매스컴 등을 통해 알려진 이미지는 다소 좁은 것으로 보인다객관적으로 죽음의 위협이 있는 일 (테러전쟁사고 등이외에도 주관적으로 생존의 위협을 느낀 일 (학대성적 폭력대인관계 상의 단절 등 트라우마를 유발할 수 있다마음의 상처가 지속적으로 다시 경험되고당시의 공포가 엄습해 오거나큰 감정의 소용돌이삶의 어려움을 유발한다면 전문적인 진료를 고려해 보기를 권고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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