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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싶지 않은데 집에만 있게 돼요.

아무것도 못할 것 같은 마음이 잘못은 아닙니다. 두두의 마음 편지

by 아는 정신과 의사


그저 익명성 있는 댓글인데도 고민을 털어놓기가 저에겐 어려웠네요.


안녕하세요. 저는 고등학교를 자퇴했습니다. 중학교 때는 적응장애? 때문에 학교생활 내내 울상으로 보내고 친구들과 첫인상에 대해 얘기하면 어딘가 불안정하고 어두워 보였다고 해요. 그래서 우울증인가 싶어서 정신과도 다녔었고, 사춘기 때라 그런지 나쁜 생각과 그런 행동도 했고요.

자퇴하고 집 밖을 잘 안 나가고, 사람들 만나기 꺼려해요. 그리고 학교에서 불미스러운 일이 생겨서 그와 관련된 단어, 사람 , 물건을 보면 하루 종일 불안하고 잠을 설쳐요. 동네는 아는 사람 만날까 봐 특히 더 싫어하는 것 같아요.


학원을 다녀볼까 했지만 집에서 혼자 공부하는 게 더 잘 맞고 형편도 안되네요. 10개월 중에 외출한 날만 추측해보면 약 5주 정도 되네요. 칩거 처음 3달 정도는 계획 세우고 공부하고 실패하고 다시 계획 세우고 하는 시행착오를 겪다가, 습관을 들여 보겠다고 나름 혼자서 고군분투하면서 스스로 게을러지지 말자고 했지만... 인간은 생각 이상으로 게으르네요. 점점 몇 달이 지나니까 내가 집을 좋아하는 집순이라 그런가? 아니면 스스로 가두고 고립시키는 걸까?라는 생각이 저를 혼란스럽게 만들었어요. 솔직히 후자의 경우가 더 큰 거 같아요.


중학생까지는 외로움에 대해 인지를 못하다가 갑자기 많은 시간과 기회, 집안이 내 세상이 돼버리니까 무인도에 떨어진 사람처럼 무척 외로웠어요. 사회성도 떨어지고 와중에 수험생활도 해야 하는데, 이게 맞나? 아닌가? 자꾸 의구심이 생겨요 물론 스스로 못 믿는 구석도 있는 것 같지만요. 사실 주요한 문제는 학교에서 있었던 일 같아요. 그래도 내 선택에 책임지고 열심히 살아야지, 언젠가는 쥐구멍에 볕들겠지 하면서 마음 한편에 희망은 품고 있어요.


저는 사람들 마음 치료해주고 싶은 꿈이 있는데, 그러기 위해서 이 고민도 이겨 내야 하는 거겠지요? 지나고 보면 경험이겠지만 현재론 너무 어려운 과제예요... 정신과상담을 받아야 할까요? 제가 뭐부터 해야 할까요 정답은 없겠지만 지금은 그냥 혼돈 속에 사는 거 같아요. 제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두두의 마음 편지)



안녕하세요.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이두형 입니다.


많은 고민을 하고, 또 큰 용기를 내서 사연을 써 주신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집니다. 이렇게 도움을 구하는 자체로 이미 스스로를 위한 큰 발걸음을 내딛은 것이라는 말씀을, 이야기에 앞서 꼭 전해드리고 싶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말 힘들었던 과거의 경험에 대해서는 차마 말씀하지 못하신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그 부분이 아마, 그토록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원하는 삶으로 나아가기를 어렵게 만들었던 원인 중 하나가 아닐까 라는 생각도 해 봅니다.


큰 상처를 경험한 마음은 이를 열심히 기억합니다. 다시 그러한 상처를 받지 않기 위해서 입니다. 그런데 불안은 의외로 정교하지 못합니다. 마음속에서는 그 때의 아픔이 끊임없이 재생되고, 그러한 아픔과 조금이라도 유사한 점이 관찰되는 사람이나 상황은 모두 피하고 싶어집니다. 누군가에게 상처를 받은 이후 사람 자체에 대한 두려움이 생기는 것은 이러한 회피의 대표적인 예가 될 수 있겠습니다.


이러한 경향이 틀렸다거나, 이를 고치기 위해 굳게 마음을 먹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조금 더 내 마음을 깊이 이해해 주고 보듬어 주어야 할지도 모른다는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사연자분께서 많은 노력을 기울이심에도 불구하고 원하는 일들을 잘 이어가기 힘드신 것은 마음가짐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아직은 그러한 것들을 이어가는 것에 대해 마음이 많이 두려워하고 있어서는 아닐 지 조심스레 생각해 봅니다.


예컨대 학원이라는 공간에 다시 놓이는 것이 두려운 마음은 집에서 공부하기를 원할 수 있습니다. 사회성이 있기를 원하고 바라는 대로 수험생활을 잘 이어나가고 싶은 마음과, 예전의 상처들로 인해 사람들에게 나아가기를 두려워하는 마음이 공존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어떤 일을 실행하기 전에 자꾸만 머릿속으로 상상을 하고 미리 시뮬레이션을 돌려보는 것 또한 불안, 두려움을 반영하는 것일 지도 모릅니다.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은 상처에 대한 기억 때문에, 내가 행할 무언가가 그러한 상처를 받을 여지가 하나도 없는지를 미리 살피는 것이지요. 그러나 완벽히 통제될 수 있는 상황이나 미래는 매우 드물기 때문에, 끊임없이 반복되는 생각 끝에는 두려움이 피어나 실제로 무엇을 행하기는 힘들게 될 수도 있습니다.


이렇듯 지금의 마음은 무엇을 시도하는 것과 예전의 아픔을 연결 지어 생각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생각으로 지금 마음이 힘든 이유나 두려운 미래에 대한 고민을 이어가는 것은 두려움을 자꾸만 만들어 낼 수도 있겠습니다.


그래서 저는 모든 과정의 첫 단추를, 이러한 내 마음을 있는 그대로 이해해 주는 데서 출발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먹고 살려면 사람들도 만날 줄 알아야 하고, 수험 생활도 다시 시작해야 하는데 내 마음은 도대체 왜 이럴까, 왜 자꾸만 게을러지고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걸까.’ 란 관점에서 ‘아, 나 스스로는 사회성도 기르고 싶고 당당하게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싶어 하지만, 아직 그것들을 두려워하는 마음도 많이 존재하는 구나.’ 라고, 통합되지 않는 양가적인 감정이 마음에 존재한다는 것을 우선 알아주시면 좋겠습니다.


이러한 관점의 연장선에서 정신건강의학과 진료를 권해드립니다. 아픔을 딛고 나아가고 싶지만 홀로는 어디로 나아갈지 몰라 혼란한 마음에 방향을 알려 줄 지도 모릅니다. 혹은 그 정도 까지는 아니더라도 타인에게 털어 놓지 못하는, 심지어 익명의 블로그 댓글로도 달기 힘든 아픔에 대해 조금씩 풀어낼 수 있는 위로의 공간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연자분께서는 많이 힘들었던 것일 뿐,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해가 구름에 가리면 우리에게는 마치 해가 사라진 것처럼 보이지만, 구름 뒤에서 해는 늘 변함없이 우리를 비추고 있습니다. 구름은 흐르지만, 햇살은 늘 그 자리에 있습니다. 사연자분은 게으름 때문에, 혹은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사람이기 때문에 무언가를 시도하기 힘든 것이 아닐 지도 모릅니다. 그저 아팠던 기억 때문에 다른 사람들 보다 일상을 보내는 데 조금 더 두려움이 많은 것일 수 있고, 이러한 불안에도 불구하고 더욱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중인지도 모릅니다.


그러한 마음을 굳이 좋지도 나쁘지도 않게, 있는 그대로 바라봐 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진료든, 산책이든, 세수든 무엇이든 좋습니다. ‘적어도 이 정도는 해야 돼.’ 라는 당위에 따라 지금의 마음이 따라오기 힘든 무리한 시도를 반복하는 대신, 지금 여기에서 할 수 있는 가장 작은 한 걸음, 그렇지만 사연자분이 원하시는 삶으로 다가가는 한 걸음을 차근차근 내딛어 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다시금 사연자분의 마음에 햇살이 깃들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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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pixab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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