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년에 쓰다 만 일기
가슴이 축축해서 잠에서 깨보기는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밤 사이 불어난 모유가 양 쪽 가슴에 동그란 흔적을 남긴 상태였다. 새벽 다섯시, 유축을 해보니 50ml나 나왔다. 하찮기 짝이 없게 적은 양만 나오던 모유가 출산 열흘 째를 넘기면서 슬금 슬금 늘어나고 있다.
아이를 낳았다. 수없이 찾아 읽었던 제왕절개 출산 후기와 마찬가지로, 시키는대로 새우등 자세를 하고 있으니 척추에 마취제가 투여됐고 하체에 뜨끈한 기운이 돌았다. "차가워요? 여기는요? 아파요? 여기는요?" 마취가 제대로 됐는지 안됐는지 몇 차례 질문을 받고 5분 정도 되었을까, 아기 울음소리가 터져나왔다. 목청이 좋은 걸 보니 내 아들이 맞긴 맞군, 짜식. 누워서 헤실헤실 웃었다. 눈물은 나지 않았다. 양 팔이 수술대 위에 묶여 있어서 고개를 돌려 아기 얼굴을 잠깐 본 게 다였다. 실감이 나지 않았다. 수면마취 해주세요. 그러곤 이내 잠들었다.
그렇게 수술대 위에 올랐다 내려왔을 뿐인데...모든 것이 완전히 바뀌었다. 기후도 언어도 풍습도 다른 새로운 나라에 착륙한 기분이다. 얇고 연약한 피부 아래 할딱이는 작은 생명체를 품에 안고 있으면 이 아이를 위해 뭐든지 할 수 있을 것만 같다. 실제로 평소에는 절대 먹지 않는 미역국을 인생 최대치로, 병원과 조리원에서 주는대로 열심히 먹고 있다. 어린 시절에 미역국 먹고 호되게 체한 적이 있어서 거의 30년간 미역의 식감 자체를 싫어했었는데 오직 모유에 좋다는 이유로! 꾸역꾸역 먹게 된다. 아이가 태어나도 내 삶은 크게 달라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건 턱없는 오산이었다. 온 신경이 오직 아이에게 꽂혀있다. 남편은 연일 놀라워하고 있다. 너에게 이렇게 모성애가 발현될 줄 몰랐다며, 남자친구를 낳았냐며 놀린다. 모성애, 라니 생경하기 짝이 없지만 이 설렘과 희망과 책임감과 약간의 비장한 마음가짐이 복합된 감정을 달리 표현할 수 있는 단어도 그 밖에 딱히 없는 것 같기도 하다.
....이렇게 호들갑스러운 글을 쓴 게 지난 일요일, 12월 29일 아침이었다. 수유콜이 와서 노트북을 닫았다. 방으로 들어온 아기에게 모유를, 이어서 보충 분유를 먹이고 트름을 시키고 자는 모습을 황홀해하며 바라보면서 남편과 아침을 먹었다. 아기를 신생아실로 보내고 한숨 돌리면서 뉴스를 보는데 제주항공 여객기 사고 속보가 떴다. '2명 구조'라고 하기에 가벼운 충돌 정도일거라고, 구조자가 계속 늘어날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탑승객 181명 가운데 오직 2명을 제외한 전원이 숨졌다. 참담한 마음으로 며칠 내내 뉴스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불편한 자세로 선잠에 들었다가 '땡' 하는 소리, 승무원의 착륙 준비 안내 방송과 함께 기내에 불이 들어오는 순간을 좋아한다. 창문 너머로 슬금슬금 바다가 가까워지면, 저 멀리 한국의 섬과 내륙이 보이기 시작하면 안도감을 느끼곤 했다. 가족과 지인들과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일상으로 막 돌아오려던 제주항공의 탑승객들도 모두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달라지는 고도에 귀가 먹먹해진 아이들이 울음을 터뜨렸을 것이고, 부모는 '이제 다 왔어, 조금만 참자'고 달래며 보드라운 귓가에 속삭였을 것이다. 평온하고 당연했을 참사 직전의 그 모든 분위기가 눈에 보이는 듯 해서 더 가슴이 아팠다. 진심으로, 삼가 머리숙여 명복을 빈다. 그리고 정확한 사고 원인, 참사를 키운 원인이 제대로 규명되어 유족들의 비통함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기를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