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천득의 [인연] - 포테이토 칩

by Cafe tulipe

여름 하루가 지나가고 있다. 고맙게도 서늘한 바람이 방충망 사이로 솔솔 들어와 주는 밤이다.

아 아직 10시밖에 안 됐으니 나에겐 초저녁이네.


오늘은 생각보다 많이 더워서 아이 친구가 놀러 오는데 데려다주러 온 동네 언니와 잠깐 인사하러 나갔다 온 거 외에는 에어컨이 나오는 나의 작은 아파트에서 하루를 보냈다.

아. 아침에 기특하게도 운동도 잠깐 다녀왔구나. 이런 건망증.

아이 낳고 시작된 소위 'mommy brain' 하는 출산 후 기억력 저하가

마지막 출산이 벌써 8년이 돼 가는데도 나아지기는커녕

이제 'perimenopausal brain fog (폐경 전후기 멍해짐)'으로 변해가고 있다.


아. 우울한 이야기는 그만.



보험회사에서 매 분기마다 보내주는, 여행을 주제로 하는 홍보용 잡지가 있는데

내가 가보지 못한, 그리고 아마 죽을 때까지 갈 일이 없을 것 같은 곳들에 대한 이야기도 종종 나와서

시간을 들여서 읽지는 않되, 화장실에는 가끔 가지고 들어가는 일이 있다. ㅎㅎㅎ


아이와 아이 친구를 먹일 저녁을 차리고 나니,

한창 쑥쑥 클 나이의 아이들이라 모자랄까 봐 나는 먹지를 않고 기다리다가

결국 저녁 시간을 놓쳤는데

배가 출출하여 포테이토 칩 하나를 열고 (밤 열 시에 양심은 있으니, 사이즈는 작은 걸로)

저칼로리 탄산수 캔 하나를 집어 들고

이번 분기는 꽤 요란하게 표지를 장식해 놓은 잡지를 열였다.



한 독자가 기고한 글에서, 마음에 담아놓고 싶은 글귀를 하나 보게 되었다.

"There was a time machine in her eyes."

오... 그녀의 눈 속에 타임머신이 있었다? 그녀의 눈 안에 자리 잡은 타임머신을 보았다...


왜 타임머신에 대한 글귀를 읽고 피천득 선생님의 수필집, [인연] 이 생각났는지 모르겠다.

내가 직접 산 책들 중 가장 오래 아직도 간직하고 있는 책이어서 그런 건지,

피천득 선생님의 많은 수필들의 당신의 과거를 상기하시며 쓰신 거라 그런 건지,

내가 한국을 기억하고 싶을 때마다 읽었던 책이어서 그런 건지...


나의 한국은, 아직 내가 떠났던 90년 중반이고

출장으로 여행으로 방문하는 현재의 한국은

한국만큼 디지털화되지 못하고 도태된 나에겐 어느 정도 이질감이 느껴지는 '외국' 같기도 하다.


피천득 선생님의 한국은

너무 어려서 잃은 엄마를 찾게 하는,

당신이 수년 전 방문했던 미국과 영국과 일본과 중국 각 곳에서 만났던 사람들을 기억하게 하는

누군가를 그리워하게 하는 곳이었나

그저 고국이어서 애틋한 곳이었나.


왠지 오늘은 달달한 간식 말고 짭짤한 간식이 당겨서 포테이토 칩을 먹고 있는데

아 짭짤함. 그저 짜기만 한 것이 아닌 '짭짤하다'라는 표현도 나는 피천득 선생님의 수필에서 보았다.


'... 나는 어려서 울기를 잘하였다. 눈에서 눈물이 기다리고 있듯이 울었다. <사랑의 학교>라는 책 속에 있는 난파선 이야기 위에는 나의 눈물 자국이 있었다. 채플린이 데리고 다니던 재키 쿠간이라는 어린 배우는 나를 많이 울렸다. 순이가 나하고 아니 논다고 오래오래 울기도 하였다. 입이 찝찔해지는 것을 느끼면서.
찝찔한 눈물. H2O 보다는 약간 복잡하더라도 눈물의 분자식은 다 같을 것이다. 그 눈물의 다양함이여!..."

- 피천득의 [눈물]에서 발췌-


애인을 보내고 눈물이 앞을 가려 타이핑 미스를 해 놓은 비서를 떠올리며 짭짤한 눈물 한 방울에 부여된 의미를 생각하게 했던 글귀도 있었다.


나도 어렸을 때 나를 울보라는 부르던 사람들이 꽤 있었다. 별거 아닌데 눈에 고이는 눈물이 싫었고 부끄러웠다.

"너무 맘이 여려서 이 험한 세상 어떻게 살려고 하니."라는 말도 수도 없이 들었다.

진심으로 걱정스러워서 하는 엄마의 말부터 시작해서, 상대방에게 상처가 되든지 말든지 그냥 던져놓고 보자는 사람들의 말까지.


눈물을 보이는 게 적절하지 않은 시추에이션에 처할 때에는 이제 적당히 내 감정을 미리 통제하는 데에 익숙한 나이가 되었고. 그게 그렇게 항상 좋은 것 같지는 않지만, 적어도 일부러 없는 눈물을 짜내어 상대방의 감정에 호소하려는 경지(?)까지는 가지 않을 테니, 조금 안심을 해본다.


다시 선생님의 수필로 돌아와서, 아마 당신의 수필들 중 가장 유명하지 않을까 하는 [인연]을 나도 정말 좋아한다. 아사코와의 세 번의 만남에 대한 이야기에 본인의 감정과 느낌에 대해 서술하시기보단 스위트피, 학교 신발장, 목련꽃, 연두색 우산, 뾰족 지붕과 뾰족 창문들이 있는 작은 집등의 매개체를 언급하시며 독자가 각 시기의 요동치는 감정을 어렵지 않게 상상하도록 이끌어가주신다.


선생님의 수필들을 소박하다고 묘사한 평가들이 많은데, 나는 선생님의 수필이야말로 짭짤한 눈물같다고 느껴진다. 엉엉 우는 통곡도 아니고, 껄껄 또는 눈물 찔끔할 정도로 푸하하핫 하는 코미디 장르는 더더욱 아닌. 한 방울씩 볼에 내려오는, 결국 입술에 닿아 짭짤하게 하는 그런 미지근한, 조용한 눈물이다. 한 85퍼센트는 그리움 때문이라고 해도 되겠다.


당신이 사랑하고 존경했던 수많은 사람들에 대한 솔직하고 왠지 수줍음과 망설여짐이 느껴지는 애찬도 너무나 좋다. 선생님은 정직하고 순수한 사람들을 사랑하셨나 봐. 위대한 사람을 우러러 동경함에 대해 써 내려간 글들도 있지만, 정직하고, 순수하고, 실수도 있고, 그래서 가난하고 아픈 사람들에 대한 뭔가를 남겨주시고 싶으셨나 보다. 찰스 램, 춘원 이광수, 로버트 프로스트, 유순이 등.


"... 그리고 그는 기쁨을 얻기 위하여 책을 읽었지 써먹기 위하여 읽지 않았다... 그의 생애가 우리 문화에 얼마나 기여하였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이 시대에 그렇게 순결한 존재가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에게는 큰 축복이라 하겠다"

- 피천득 [어느 학자의 초상]에서 발췌-


순결한 존재임 자체로 누군가에게 축복이 될 수 있는 어른이 될 수 있을까.


피천득 선생님. 선생님의 글이 나에겐 그런 존재입니다. 소확행이라기엔 너무나 오랜 세월 동안 많은 행복하고 의미 있는 시간을 주셨네요. 순결하고 고귀하기까지 한 내가 사랑하는 글입니다. 저도 선생님처럼 과시와 과장 없이, 정말 중요하고 귀중한 것이 무언지를 매 순간 잊지 않고 살고자 합니다. 이 책을 읽는 이 시간이 나에게 매번 주어지는 소중한 인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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