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이나 원을 구속하기 위해서는 원점에서부터의 위치와, 선이나 원의 크기를 지정해 주면 됩니다.
스케치를 다 그리고, 갈색이던 선들에게 하나하나 구속을 줄 때마다 녹색으로 변하는 것을 보는 즐거움, 그리고 마침내 모든 선들이 완전히 구속되었다는 메시지와 함께 눈앞의 녹색의 스케치를 마주 했을 때의 쾌감!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절대 알 수 없는 즐거움입니다.
하늘을 자유롭게 날고 있는 각종 연들을 바라보면 시간 가는 줄을 모릅니다. 요즘은 옛날과 다르게 종류도 엄청 다양해졌죠. 보기만 해도 놀랄 어마어마한 크기의 연을 보면 저 연엔 사람도 매달릴 수 있겠다 싶습니다. 연은 얼레에 엮긴 실로 한 손 내지는 두 손으로 가볍게 조작하는 것이라는 개념을 지닌 분들에게는 연 줄을 몸의 허리춤에 감고 휘청이면서 조정하는 사람을 보여주면 또 다른 연의 세상을 발견하게 되는 거죠.
연이 하늘을 자유롭게 곡예를 하면서 날 수 있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줄에 구속되어 있다는 겁니다. 얼레를 놓치거나 줄이 끊어지면 그 위풍당당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흐물흐물 땅으로 떨어지는 거죠.
사람도 그런 거 아닐까요?
혼자 있는 사람은 외로워요. 아마 혼자 있고 싶은 사람은 없을 거예요.
'난 혼자가 좋은 걸?', 하시는 분은 곁에 누군가가 있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당분간은 혼자가 좋죠. 그러나 영원히 혼자라고 생각하면 상황이 달라질 거예요.
하나님도 혼자가 아니에요. 세 분이 함께하시는 거죠. 창세기에 여러 번 하나님을 칭하는 대명사로 '우리'를 사용했어요.
히브리어 원문 성경에 보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에서 하나님을 뜻하는 '엘로힘'은 복수고요, 반면 '창조하시니라'를 뜻하는 '바라'는 단수 동사라고 합니다. 주어가 복수인데, 동사는 단수 동사라는 독특한 개념입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이라고 말하냐고요? 그건 완벽하게 설명할 수는 없어요. 인간 기준으로 생각하거나 이해할 수 없는 존재니까요. 그 세 분의 관계가 절대 서로를 밀어내거나 뜻이 어긋나지 않는 관계라고, 이 세상에서는 존재할 수 없는 관계라고 말할 수는 있습니다.
혼자가 아닌 하나님이 혼자인 아담의 모습이 안 좋게 보이셨어요. 그래서 각종 동물들을 만들었는데, 결국 그들 중에는 아담에게 맞는 짝이 없었습니다.
이 때문에, 하나님은 세상 최초의 마취와 유전자 복제 수술을 실행하셨어요. 하나님은 왜 다른 동물들과 아담처럼 흙으로 만들지 않았을까요. 아마도, 특별하니까 그러셨겠죠?
어쨌든, 아담의 갈비뼈로 하와를 만드셨어요. 깊은 잠에서 깬 아담은 하와를 본 순간,
'내 뼈다귀!, 내 살!'이라고 말했어요.
아담은 대번에 알아봤어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을까요? 아마도 각양 새와 동물들을 이미 만나보고 이름까지 지어 준 경험이 있는 아담은 모습이 가장 자신과 닮은 하와를 보고 알아챘나 봅니다. 아니면 우스개 소리지만, 대 수술을 경험한 아담이 욱신거리는 자기의 배를 만져보고, 갈비뼈를 튕겨봤더니 하나가 빈 것을 알아보면서 '아하, 내 뼈가 맞네!' 했을지도 몰라요.
완벽하고 아름다운 구속은 자유로움을 가능하게 합니다. 줄에 매달린 연처럼.
그리고 혼자서는 불가능합니다. 원점이 필요하고요, 그리고 짝이 필요해요.
인간에게는 그 원점이 하나님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배우자가 그 짝이죠.
행복해지고 자유로워지고 싶으신가요?
그럼 하나님을 만나셔야 합니다. 그리고 인생을 함께 할 짝을 만나세요. 그러기 위해 마음을 다해 찾으려고 노력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