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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무 Oct 20. 2023

바다는 잘 있습니다

by 이병률

영어로 책을 읽어야만 했던 해외생활 속에 가족들이나 친구들이 보내주는 책들은 가뭄의 단비 같은 반가움이 깃들어 있었습니다. 그중 저한테는 다소 생소했던 이병률 작가의 <끌림>이라는 책은 마치 한 번도 만나보지 못했던 사람을 처음 만나는 자리에 낯설지 않음을 느꼈을 때와 비슷한 결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정확한 문장은 기억이 안 나지만 “서부 캘리포니아는 아무 생각이 없어지는 곳이고 뉴욕은 외롭게 하는 곳”이라는 문장 하나가 제 마음 모두를 표현해 주는 같아서 당황스러우면서도 기뻤습니다. 그 이후 작가님의 책을 한 권씩 읽게 되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시인으로 등단하신 분이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이 책은 바다라는 단어를 좋아해서 샀습니다. 바다를 닮은 친구가 생각이 나서 안부를 묻는듯한 제목에 끌려 샀지만 사실 아무리 유명시라고 해도 와닿지 않으면 그저 글귀가 된다는 사실도 각인시켜 줬습니다. 저는 오늘 소개해드리는 시가 더 좋았습니다. 모르겠지만 나중에 표제시가 저에게 새롭게 다가올 수도 있다는 기대감도 듭니다. 시는 문득 이럴 때 써지는 것이라고 이야기도 들려줍니다. 아무것도 아닌 찰나의 경험이 갑자기 누군가를 생각나게 하고, 아이디어를 떠올리게 하기도 하는데 ‘고양이와 그 뒤 피어오르는 그때, 흘린 것을 감아올릴 때, 그것을 움푹한 처소에 담아둘 때’ 라며 말하며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이게 만들었습니다. 그런 때 쓴다고 하는 이병률 시인의 표현은 참 담담하면서도 생동감 있어서 좋았습니다.


감히 추측하건대 시를 쓸 때 어느 한 사람을 떠올리면서 잊지 못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손바닥으로 가려준 그늘, 그 아래서 나른한 감정의 온도까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고 심지어 느끼기로는 잊을 마음도 없어 보였습니다. 어떻게 보면 누구나 겪어 본 찌질한 이별 후일담일지도 모르지만 이렇게 시를 쓰니 한층 비장함마저 느껴졌습니다.



사람이 온다


바람이 커튼을 밀어서

커튼이 집 안쪽을 차지할 때나

많은 비를 맞은 버드나무가 늘어져

길 한가운데로 쏠리듯 들어와 있을 때

사람이 있다고 느끼면서 잠시 놀라는 건

거기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낯선 곳에서 잠을 자다가

갑자기 들리는 흐르는 물소리

등짝을 훑고 지나가는 지진의 진동


밤길에서 마주치는

눈이 멀 것 같은 빛은 또 어떤가

마치 그 빛이 사람한테서

뿜어 나오는 광채 같다면

때마침 사람이 왔기 때문이다.


잠시 자리를 비운 탁자 위에

이파리 하나가 떨어져 있거나

멀쩡한 하늘에서 빗방울이 떨어져서

하늘을 올려다볼 때도

누가 왔나 하고 느끼는 건

누군가가 왔기 때문이다.


팔목에 실을 묶는 사람들은

팔목에 중요한 운명의 길목이

지나고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겠다.


인생이라는 잎들을 매단 큰 나무 한 그루를

오래 바라보는 이 저녁

내 손에 굵은 실을 매어줄 사람 하나

저 나무 뒤에서 오고 있다.


실이 끊어질 듯 손목이 끊어질 듯

단단히 실을 묶어줄 사람 위해

이 저녁을 퍼다가 밥을 차려야 한다.


우리는 저마다

자기 힘으로 닫지 못하는 문이 하나씩 있는데

마침내 그 문을 닫아줄 사람이 오고 있는 것이다.



시라는 것은 참 알 수 없는 매력이 있어서 그런지 희한하다는 생각을 가끔 합니다. 소설처럼 이야기와 주인공이 있어서 연결이 되는 것도 아니고 물리적으로(?) 지식이나 노하우를 전수해 주는 책도 아닌데 참으로 매력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시집들은 얇아서 언제든지 읽다가 멈춰도 되는 다소 편하게 접할 수도 있고 몇 년 전에 봤던 걸 다시 보면 전혀 새롭게 다가오는 경우들도 있어서 더더욱 빛이 나는 거 같습니다. 아마도 시간이 지나면서 마음의 결이 달라지면서 읽는 상황이나 기분에 따라서 자유롭게 느낄 수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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