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무무 Nov 20. 2023

의식은 육체에 굴레에 묶여

by 수전 손택

노트 한 권이 마무리돼서 덮었습니다. 새로운 노트를 사서 기분을 내려고 기존에 썼던 노트를 다시 주문을 하고 오늘 덮은 노트에 뭘 적었는지 훑어보았습니다. 첫 장을 넘기면서 쓱 보다가 이전에 썼던 노트들을 거슬러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이전에 썼던 게 마음에 들어서 핸드폰 메모장에 옮기기도 하고 왜 이렇게 썼지 하고 손발이 오그라드는 부끄러움을 느껴 얼른 페이지를 넘기기도 하였습니다. 당시에 적어놨던 음악 리스트를 보고 유튜브에 가서 들어보기도 하고 적어놓고 까먹고 있던 책들은 알라딘이나 중고책 서점 장바구니에 담기도 하였습니다. 일기이기도 하고 낙서이기도 하고 절대 써먹지 못할 생각들이나 단어들도 눈에 보이고, 이 당시에 무슨 생각을 하였는지도 눈에 들어와 신기하였습니다.


제 노트는 손택의 일기에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처음 노트를 사서 적을 때는 그저 예쁘게 문장들을 적으려고 했기에 억지스러운 면도 있었고 무슨 말을 하는지도 나중에 보면 모르는 경우들이 숱하였는데 손택의 일기를 보고 반성했던 기억이 납니다. 단어나 책, 음악, 영화 등의 리스트를 나열한 모습과 짧게 그렇지만 핵심만을 적어놓은 문장들, 그리고 당시 있었던 중요한 뉴스를 그대로 옮겨 적는 것도 보였습니다. 노트는 이렇게 일기처럼 최대한 솔직하게 적어야 한다는 생각을 그녀의 일기를 보고 느꼈고 어렵지 않고 쉽게 적어야 한다고 생각을 하였습니다.


이 책은 1964년부터 1980년까지 적어놓은 일기를 아들이 모은 것입니다. 너무 개인적인 것들이나 문제가 될만한 것들만 빼고 옮긴 거라고 합니다. 이 시기는 그녀가 <해석에 반대한다>라는 평론집을 세상에 내놓으면서 문화계의 전면에 나서는 시기였고 그래서 주목을 받던 때였습니다. 해박한 지식과 날카로운 지성으로 인권과 사회 문제까지 거침없는 비판과 투쟁을 하던,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행동하는 지식인이었을 때의 일기입니다. 세상에 일침을 날리면서 요즘 말로 걸 크러쉬 면모를 보여주던 그때에도 한 사람으로서 애인과의 일에 가슴 아파하고 슬퍼하는 모습들은 우리들과 전혀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녀의 일기를 보면서 뜨겁게 읽고 보고 사유하고 사랑하고 행동했던 삶인가를 보게 되었습니다. 너무나 열정적이었던 그녀의 이전 일기와는 조금은 다르게(유년시절에 썼던 일기: 다시 태어나다) 한 인간으로서 여유로우면서도 무르익은 손택을 이 책에서는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녀의 지적이고 날카로운 통찰력은 어마 무시한 노력으로 나왔구나라는 늘 저에게 자극을 주는 이 사람의 일기를 읽는 내내 닮고 싶고 본받고 싶어서 가슴이 뛰었습니다.



P : 누가 지적이든 아니든 나는 그런 건 관심을 갖지 않는다. 사람들 간의 상황은 무엇이든, 서로 정말로 인간적으로 대하기만 한다면, '지성'을 창출해 낸다.


P : 내 인생에서 아이린의 등장은 커다란 전환점이었다. 그녀는 내게 심오하게 이질적인 생각을 처음 소개해 주었다. 바로 '나 자신'을 본다는 생각이었다.


P : 하노이는 폭격 전 인구가 대략 백만 명이었고, 지금은 (1968년) 약 이십만 명이다.


P : 빅토르 위고의 좌우명: "문체는 간결하게, 생각은 정확하게, 삶은 단호하게"


감정과 이성 사이를 넘나들며 짧게 써 내려간 메모 글은 쾌감도 느끼려 하자 저에게는 허락하지는 않았습니다. 31살부터 47살까지의 작가의 인생에 대한 사유와 통찰을 읽어내며 제가 한 곳에 너무 편중되어 있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책상에만 머무르지 않고 직접 행동으로 보여준 수전 손택의 열정적 삶에 박수를 보내고 싶었습니다. “무엇을 해야 하나?” 하는 여유로운 마음을 가지고 있는 제게 회초리 같으면서도 엄마의 품과 같은 책이었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일기 여행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