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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무 Sep 01. 2023

가면의 생

에밀 아자르

서점에 가서 책을 둘러볼 때 제가 제일 두려워하는 것 중에 하나가 편견입니다. 작가의 이름이나 타이틀, xx수상작에 현혹되지 않기 위해 항상 처음 들어보는 작가의 책을 한 권씩은 사서 나옵니다. 띠지를 보고 혹은 누구누구의 추천을 최대한 보지 않고 책 처음이나 중간쯤을 펼쳐서 마음에 드는 문장이나 단어들을 찾으면서 고르는 편입니다. 그 시작점을 알게 해 준 책이 저에게는 에밀 아자르, 바로 로맹 가리였습니다.


로맹 가리가 가명을 쓰기 시작한 것은 세상에 대한 모순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로칼랭>을 퇴고까지 마친 그는 출판사에도 알리지 않고 가명으로 발표할 결심을 하게 되었는데, 이유인 즉 명성이나 이전에 그가 써온 작품의 평가 기준을 멀리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가 자주 쓰는 말을 인용하면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내 얼굴”은 책의 본질 사이와 모순이 많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에 그런 것들에서 벗어나기 위해 에밀 아자르, 혹은 다른 이름들이 필요했습니다.


이 책은 에밀 아자르의 삶이었습니다. 로맹 가리는 자신의 출생증명을 끊임없이 증명하려는 듯하였고 스스로 조작된 존재이며 스스로 비단뱀이 되었다가 어딘가에 얽매이는 걸 원치 않아 책이 되기도 하고 자신에게서 멀어지기 위해 나 아닌 존재를 만들기 시작합니다. 아자르를 통해 그는 현실에서 숨을 쉴 수 있었고 마음의 취조를 피하기 위해 몸을 감출 수 있는 공간이기도 했습니다.


사실 이런 배경을 빼고 읽으면 정신 나간 사람이 휘갈겨 쓴 이야기로 치부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삶과 연결을 해보면 이 책에서 자신의 분신과 본인이 마주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자신을 증오하고 자신이 경멸해 마지않는 추함마저 보여주며 고통을 그대로 느낍니다. 그는 그의 분신에게 왜 글을 쓰는지 묻습니다. 대답은 아마 이 책일 것입니다. 이 책에는 가상의 인물 크리스티안센 박사와 통통 마쿠스가 등장합니다. 에밀 아자르를 탄생시킨 그의 아버지이자 삼촌이며 그의 은신처가 되어줍니다. 로맹 가리는 자신이 크리스티안센 박사이자 통통 마쿠스이며 에밀 아자르와 대화를 나눕니다. 아자르를 설득하고 그에게 아자르가 되어 글을 쓰고 자신을 비우고 불평도 그만하라도 이야기합니다.

이 책은 로맹 가리가 20살에 집필을 시작해서 60살이 넘어서야 완성한 책입니다. 이 책의 매력은 한 글자 한 글자 곱씹게 만드는 몰입도에 있는 거 같습니다. 분명히 내가 글을 읽고 있는데 다른 사람의 머릿속을 들여다보는 듯했고, 처음 읽었을 때는 조금은 난해한 느낌이 들어서 무엇을 읽었는지 알 수가 없었는데 그래서 그런지 한번 더 책을 펼치게 만들었습니다. 로맹 가리의 의식 주변에는 언제나 그의 등장인물들이 모여 사는 거 같았습니다. 한 사람이 어떻게 살면 이런 영감을 떠올릴 수가 있을지 감탄하며 읽었습니다.



P : 나는 익명으로 남고 싶었다. 익명의 시골에서 익명의 여자와 익명의 사랑을 나누고, 익명의 가족을 이루고, 익명의 인물들을 모아 새로운 익명의 세계를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P : 시작이란 없다. 나는 누군가의 자식이고, 사람은 각자의 차례대로 이 세상에 태어난다. 그러고는 어딘가에 소속된다. 나는 그 굴레에서 스스로 벗어나기 위해 온갖 시도를 다 해보았다. 하지만 그 일을 해낸 사람은 없었다. 인간이란 모두 어딘가에 더해진 존재다.



아마 우리들 모두 가면을 쓰고 살아갑니다. 로맹 가리의 인생이 내 인생이라고 생각해 보면 계속 가면을 바꿔 쓸 수밖에 없을 것이고, 급기야는 그것이 자신의 정체성이 되어버릴 수밖에 없었을 거 같습니다. 어쩌면 에밀 아자르가 날 것 그대로 보여주는 자신의 내면 풍경인 거 같습니다. 이 책을 읽으면 <자기 앞의 생>을 쓴 사람이라고는 도저히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마지막 문장을 보면 모든 게 납득이 됩니다.



P : "우리가 당신들을 위해서 뭘 하면 좋을까요?"

"계속해서 글을 쓰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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