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무무 Aug 24. 2023

로맹 가리와 진 세버그의 숨 가쁜 사랑

by 폴 세르주 카콩

지금 TV는 UHD 시대로 접어들었지만, 저는 필름 스크래치 자국이 선명한 고전 영화를 좋아합니다. 아날로그 특유의 감성적 매력을 느껴 주말이면 한편 정도는 찾아서 꼭 보려고 하는데, 그중 기억에 남는 건 <네 멋대로 해라>입니다. 대학교 근처 조그만 극장이 있었는데, 처음으로 본 흑백 영화가 이 영화였습니다. 제가 기억하는 영화는 쇼트 커트의 진 세버그가 나왔고 중절모를 쓴 장 폴 벨몽도가 나왔습니다. narrative는 제멋대로 질주했고 컷은 사정없이 튀었으며, 어떻게 지나가는지 모를 90분이 지나고 영화는 갑자기 “띡”하고 끝이 났는데 압도되어 영화관에서 앉은 채 멍하니 엔딩컷을 바라봤던 기억이 납니다.


진 세버그는 관습과 기성질서를 타파해 새로운 영화를 탄생시키겠다는 누벨바그의 살아있는 상징이었습니다. 그녀의 짧게 깎은 머리는 여성을 새롭게 정의했으며 수천 년간 여성 위에 군림해 왔던 남성 사회를 대담히 도발하였고, 그 시도는 성공적이었습니다. 세상은 열광했고 숏 커트를 한 여자들이 파리를 가득 채웠습니다. 가능성은 인정받았으나 결코 크게 성공하지는 못했던 이 미국 출신 여배우는, 저항과 변화의 상징이 되어, 지구 반대편인 프랑스에서 뜻밖의 대성공을 거둡니다.


미국에서 태어났으나 프랑스에서 성공했고 러시아에서 태어났으나 역시 프랑스에서 성공한 로맹 가리는 진 세버그의 고향 미국에서 처음 만납니다. 진 세버그는 위트와 유머와 부와 명예와 권력과 잘생긴 외모까지 갖춘 로맹 가리에게 빠져 들었고, 다가올 불행을 까맣게 모르고 있던 전 남편은 로맹 가리에게 자신의 아내를 보살펴 줄 것을 부탁하고 프랑스로 떠납니다. 전남편이 돌아왔을 때 진 세버그는 이혼을 통보했습니다. 로맹과 진의 새로운 시작이 박살 난 사랑의 폐허에서 탄생을 합니다. 진의 열정으로 로맹 가리 또한 이혼을 하고 두 남녀는 24살 차이를 극복하고 결혼합니다.


진 세버그는 결혼 후 사회에서 소외받은 약자에게 손을 내밀었습니다. 흑인 인권 운동에 참여했고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을 도왔습니다. 하지만 당시는 매카시즘과 인종차별의 악랄함이 박애 정신과 숭고한 희생을 짓밟던 시절이었고, 진 세버그는 '흑인들의 창녀'라고 불리게 됩니다. FBI는 그녀를 빨갱이로 간주해 사생활을 감시했고 그녀의 명예를 실추시킬 수 있는 일이라면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언론에 공개하며 악의적인 가십을 만들어 그녀의 사생활을 파괴했고 보수적이었던 진 세버그의 가족은 그녀를 버리게 됩니다. 로맹가리는 알코올중독까지 걸려버린 그녀의 옆을 지켜줍니다. 그는 수많은 이데올로기가 짧은 시간 발화했다 먼지처럼 사그라드는 것을 경험했고, 무엇보다 세상의 비열함을 알고 있었기에 시간이 지나가기를 바라며 혈기왕성한 그녀를 진정시키려 애씁니다. 진실과 정의는 영원불변한 가치처럼 빛나는 것 같지만 해가 지고 어둠이 내리면 순식간에 빛을 잃고 사라져 버리고 열광했던 사람들은 전혀 몰랐던 일인 것처럼 집으로 돌아가리라는 걸 그는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알기엔 진이 너무 어렸습니다. 그녀는 언제나 유보적이고 불의와 차별에 저항하지 않으며 행동하지 않는 로맹 가리를 매도하며 다툼이 시작되었고 둘 사이는 틀어지게 됩니다. 평생을 인종차별과 소외와 싸워온 로맹 가리이기에 저런 말들을 참기 힘들었을 겁니다.


이 책은 세기의 커플이 처음 마주친 장면에서부터 진과 로맹이 각각 약물 과용과 권총 자살로 삶을 마감한 마지막 순간까지 사랑의 역사를 재구성하였습니다. 결국 두 사람은 이혼을 택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민과 우정으로 단단하게 결합되어 있었습니다.



P : 강이 나타나면 흘러내려가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거슬러 올라가고 싶어 하는 사람들도 있다. 진 세버그는 후자에 속했고, 로맹 가리 역시 그랬다. 두 사람 모두 나름의 방식으로 세상을 바꾸는 사람이었고 황금을 찾는 사람이었는데, 그런 사람들에게는 휴식도 구원도 전혀 없다.



이 책은 치열했던 시대의 치열한 삶을 살다 간 평범하지 않았던 두 남녀의 아름답기보다는 처절한 사랑이야기입니다. 두 사람의 전기는 영화보다 더 영화 같았습니다. 그간 호사가들과 대중의 판타지로 변질된, 또는 사회 관습과 외면으로 처량하게 유린된 로맹 가리와 진 세버그의 삶 그리고 사랑을 진실하게 접할 수 있는 책입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밤은 고요하리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