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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무 Oct 11. 2023

소설 11, 책 18

by 다그 솔스타

노년의 대작가가 공항에 있는 서점을 들립니다. 그리고 이 책을 손에 들고 몇 페이지를 읽더니 그 자리에서 바로 구매를 합니다. 공항에서 비행기를 기다리는 동안, 그리고 비행기 안에서 이 책을 읽고 한동안 하지 않던 번역에 대한 욕구가 솟아오릅니다. 그는 심지어 여행 동안 틈틈이 번역을 했고 돌아와서 작업을 한 후 출판사에 고이 전해줍니다. 노년의 대작가이자 자신이 좋아하지 않으면 번역을 하지 않는 무라카미 하루키와 이 책과의 인연입니다. 일본 번역을 맡은 하루키는 <가디언>과의 인터뷰에서 솔스타의 작품은 아주 기묘하면서도 매우 진지하다며 번역을 한 이유를 밝히기도 했습니다.


이 책은 지금 반복된 일상에서의 권태로 가득 찬 어느 한 남자의 이야기입니다. 결혼도 하고 2살 된 아들도 있던 비에른 한센은 매력적인 여성을 만나 바람을 피우고 그녀와 살기 위해 가족을 버립니다. 그 외도는 아내와의 권태로부터 시작되었을 텐데 과감한 모험을 강행했던 이 여자와도 결국은 끝이 좋을 리가 없습니다. 매력적인 외모가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이별은 그렇게 찾아오고 어느덧 성인이 된 아들을 만나서 함께 생활하면서도 마치 남을 보듯이 아들의 나쁜 점을 너무나 객관적으로 들춰냅니다. 자신이 낳은 자식이라면 조금이라도 편애하는 마음이 더 강할 텐데도 건조하고 냉정하게만 바라봅니다. 자신의 직업과 취미 생활에도 그다지 열정이 있어 보이지는 않는 그의 삶 전체가 권태로 가득 차있습니다. 결국 권태에서 도망치기 위해 황당한 사건을 벌이는데 그제야 왜 책의 표지 그림이 이러했는지 이해가 되었습니다. 표지에서 그는 뒷모습만 보이는데 아마도 일을 벌인 후 과거를 돌아보며 깊이 후회하고 있어서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런 내용들만 보인다면 삼류 막장드라마로 치부될 수도 있습니다. 그저 권태로부터 탈출하고 싶은 마음을 가진 사람으로 보이지만 그렇지 않았던 이유는 누구나 가슴에 품고 있는 일탈을 과감히, 그리고 무감하게 저지르는 그의 행동에 자꾸 눈길이 갔기 때문입니다. 권태라는 지루한 일상도 잃어버리고 나면 소중해질 걸 알아서 그의 다음 인생이 가엾게 여겨지기도 합니다. 작가는 비에른이 느끼는 삶의 회한, 권태, 되돌릴 수 없는 지난 세월에 대한 성찰과 가책 등을 멀리서 응시하면서도 섬세하고 깊이 있게 그려냅니다.



P : 이 이야기가 시작되는 시점에, 이제 막 쉰 살이 된 비에른 한센은 콩스베르그 기차역에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P : 세상에 영원한 진리는 없어요. 정신없이 돌아가는 삶의 리듬이 있을 뿐이죠. 그때그때의 상황은 창공이고, 완벽한 사람들은 거기에 떠 있는 별이에요.


P : 생각해 봐요. 평생을, 그것도 내 평생을 살면서 내 마음속 가장 깊은 곳의 욕구를 알아봐 주는 곳으로 가는 길을 찾아내지 못했다니! 나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침묵 속에 죽을 겁니다. 할 말이 없으니까요. 이런 생각을 하면 겁이 납니다.



이 책의 제목이 왜 이렇게 되었을지 찾아보니 솔스타는 독자들이 작품을 읽기도 전에 제목에 너무 의미를 부여하게 될 것을 염려하여 자신의 11번째 소설, 18번째 책이라는 뜻으로 제목을 지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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