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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무 Oct 13. 2023

절망

by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띠지를 유심히 보는 편은 아니지만 “나는 오늘 나를 죽였다.”라는 멋진 문구가 눈을 사로잡았고 좋아하는 작가의 모르는 작품이라는 사실에 한 페이지도 넘겨보지 않은 채 서점에서 바로 구매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보코프의 처음 보는 작품이었고 원서를 찾아보니 러시아 원문이 있다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미국으로 망명하기 전에 쓰였다는 사실과 흔히들 말하는 그가 쓴 그의 인생 전반기에 나온 책이라는 사실을 미리 찾아보고 책장을 열었습니다. 물론 <롤리타>로는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졌다면 이 책은 작가들의 작가로 명성을 안겨주었다는 사실도 나중에 알게 되었습니다. 미국으로 가기 전 베를린에서 망명생활을 하던 중 발표했는데 실제 1931년 독일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살인 사건을 모티브가 되어 집필하게 되었습니다.


이 책은 참회를 거부하는 살인자의 고백록입니다. 주인공 게르만은 자신의 치밀한 살인 계획을 예술 작품으로 여기며 자신의 천재성을 세상에 보여주려고 살인의 과정을 기록합니다. 그리고 이 책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자신을 탐색하는 존재라는 사실이었습니다. 나와 같은 이가 존재한다는 가능성은 누구에게나 의문스러운 궁금증으로 다가옵니다. 진짜로 존재할까 싶은 묘한 호기심이나 존재하면 어쩌지 싶은 공포 따위의 것들이 남아서 문학으로 많이 승화되었습니다. 수백 년 문학의 역사에서 분신이란 소재의 명맥이 끊어지지 않은 것도 어쩌면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나와 같은 존재로써 나를 알고 싶은 인간 본연의 욕망이 닿아있는 지점이 바로 분신, 도플갱어가 모티브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책은 분신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자신과 똑 닮은 이를 통한 완전범죄를 꿈꾸는 한 예술가의 심리를 현란한 언어로 그려냅니다. 독자는 자신을 완벽한 예술가로 간주하는 주인공 게르만과, 나르시시즘에 빠진 편집광 게르만의 정체를 암시하는 숨은 작가 나보코프 사이에서 끊임없이 진실을 볼 것을 요구합니다. 나보코프는 이렇게 독자들과 문학적 유희를 벌이며 작가와 주인공 사이에서 진실을 분간하지 못하는 독자를 우롱(?)하는 느낌도 받습니다. 과연 게르만의 '절망'이란 무엇을 향한 것이었을지 읽을 때마다 달라지는 그 근원을 찾아가는 묘미도 쏠쏠합니다.



P : 그래요, 난 전부 의심하게 되었소. 핵심을 의심하게 된 거요. 그리고 길지 않은 여생을 온전히 단 하나, 이 의심과의 헛된 싸움에만 쏟게 되리라는 사실을 알아버렸소. 나는 사형수의 미소를 지었소. 그리고 고통스러워 비명을 질러대는 뭉툭한 연필로 첫 페이지에 재빨리 그리고 단호하게 ‘절망’이라는 단어를 썼소. 이보다 나은 제목은 찾을 수 없소.



이 책에 대해 나보코프는 “나는 <절망>에서 나의 다른 책들에서처럼 어떠한 사회적 논평도 제시하지 않고, 어떠한 교훈도 입에 담지 않는다. 이 책은 인간의 정신을 고양시키지도 않고, 인류에게 올바른 출구를 제시하지도 않는다.”라고 인터뷰한 적이 있습니다. 문학에서 얻고자 하는 그 무엇도 주지 않는 오만한 책에 매혹되었습니다. 교훈이나 의미를 찾는 대문호들의 글보다는 삶의 지향점을 보여주지 않아서 그냥 책 자체를 즐길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철학은 부자들의 발명품!”이라고 이 책에서 나옵니다. 그저 이 책에는 예술에 도달하려는 작가 지망생의 하루하루가 기록되어 있을 뿐입니다. 매 장에 걸쳐 등장하는 글쓰기의 고통은 삶의 고역과 다르지 않아 보였고 인간을 존재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게르만의 기록은 그 자체로 곧, 위대한 문학임을 말하는 거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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