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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무 Nov 02. 2023

시몬 드 보부아르 연애편지

by 시몬 드 보부아르

아무렇게나 쓰는 노트를 펼치고 연필로 몇 번이나 썼다 지웠다를 반복하며 편지지를 꺼냈었습니다. 시간이 그렇게 지나간 줄 모르고 당황하며 필통에서 마음에 드는 볼펜을 하나 골라서 기도하는 마음으로 글을 옮기기 시작했습니다. 대학교에 들어가 같은 과 그 친구의 옆자리에 앉은 게 우연이 되어 친하게 지내다 편지로 마음을 전했는데 훗날 오그라들어 읽을 수 없던 그 편지를, 20살의 풋풋했던 서툴고 부족했던 제 첫 편지를, 그녀는 수년간 간직해 줬던 기억이 납니다. 내 마음이 잘 전달되기를 바랐던 그 마음과 한결같이 간직해 줬던 따스한 순간이 저에게는 편지라는 이미지와 제일 맞닿아 있습니다.


보부아르는 1947년 미국 강연을 위해 여행길에 올랐고 우연히 만난 작가 넬슨 앨그렌을 만나 첫눈에 반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그녀의 나이는 39세였고 이때부터 그녀는 20년간 시카고의 연인에게 수백 통의 편지를 보내게 되었습니다. 이 책에 실린 그녀의 편지는 총 304 통입니다. 보부아르는 프랑스어를 모르는 연인을 위해 다소 서투른 영어로 글을 씁니다. 우리가 떠오르는 그녀의 이미지는 조금 강한 모습의 페미니스트적인 조금은 날카로운 모습들로 뇌리에 각인이 되어 있을 듯한데 이 책에서는 전혀 그런 모습을 볼 수 없고 오히려 다정다감하고 관능적인 여인의 내면만을 부드럽게 녹아들어 간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둘 사이만 알 수 있는 감미롭고 뜨거운 사랑의 밀어뿐만 아니라 그녀의 독서 편력과 여행에 대한 열망, 사르트르와의 이상한(?) 관계, 당시 파리 지식인들의 삶도 함께 담겨 있습니다.


사르트르와 구두로 계약 동거에 합의해 화제를 불러일으켰다는 정도만 알고 있었는데 이 편지에서 앨그렌을 나의 남편이라고 부르는 것에 조금 놀라웠습니다. 실제 두 사람은 결혼에 대한 열망을 갖고 있었으나 보부아르는 오늘의 자신을 있게 한 사르트르를 저버릴 수 없었으며 앨그렌 또한 시카고를 떠날 수 없었습니다. 사랑하지만 함께 있지 못한다는 안타까움으로 둘은 괴로워했습니다. 출판사는 당초 두 사람의 편지를 순서대로 교차시켜 책으로 엮을 계획을 하고 있었습니다. 앨그렌의 미국 대리인을 통해 이를 거부했고 보부아르의 편지만 싣게 된 것입니다.


보부아르에게는 사실 또 한 명의 외도의 대상이 있었습니다. 프랑스 감독 클로드 란즈만인데 18살 연하였으며 그와도 100통이 넘는 편지를 주고받았고 이 책 보다 좀 더 과감하고 외설적이기도 합니다. 이 편지는 서로 공개되지 않기를 바랐지만 란즈만이 보부아르의 딸을 입양하며 생긴 갈등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공개가 되었습니다.



P : 저는 항상 당신과 함께 있을 거예요. 시카고의 슬픈 거리에서 지상으로 가는 지하철 철교 아래에서, 고독한 방 안에서 저는 사랑하는 남편과 함께 있는 사랑스러운 아내처럼 당신과 함께 있을 거예요. 우리는 깨어나지 않을 거예요. 왜냐하면 그건 꿈이 아니니까요.



최근에 보부아르가 사르트르의 마지막 10년의 기록을 적어놓은 책이 나왔습니다. (<작별의 의식>, 현암사) 그 책을 읽기 전 저는 이 책을 다시 읽었고, 이전에 첫사랑에게 받은 편지, 지인들에게 받은 편지, 어머니에게 받은 편지를 다시 읽어보았습니다. 편지는 영원히 기억하게 만들어주는 이상한 힘이 있습니다. 편지를 썼을 때의 제 기분과 받았을 때의 행복감, 당시에 저를 둘러싸고 있던 주변 환경들이 다시금 기억에서 되살아납니다. 그래서 가끔은 저도 카톡이나 이메일이 아닌 손으로 적은 편지를 몇몇 지인들에게 보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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