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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무 Oct 19. 2023

사탄 탱고

by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

제목을 보고 영화를 좋아하시는 분들에게는 작가와 같은 나라 영화감독 벨라 타르가 리메이크한 흑백영화를 기억하시는 분들이 많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여러 필름 페스티벌에 상영되면서 많은 매니아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고 하는데(저는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 무려 438분이라는 긴 시간 동안 5~10분짜리 다수의 롱테이크를 삽입한 영화라고 합니다. 이렇게 말로만 들으면 지루할 만한 형식인데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의 인생 작품으로 꼽히는 이 영화는 원작이 지닌 인간 본성에 대한 치밀한 탐구 때문이라고 감히 추측해 봅니다.


동명의 영화의 제목과 같은 이 책 또한 롱테이크처럼 긴 문단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처음에는 이렇게 긴 문단이나 문장들이 익숙하지 않아 잘 읽히지 않았는데 어느덧 수십 페이지에 걸쳐 있는 한 문단을 읽는 동안 이상하게도 상황을 멀리서 관망하는 대신 등장인물 바로 옆에서 동참하는 듯한 생생함을 느끼게 됩니다. 책 속의 인물들은 이기적이고 추악한 행태를 보입니다. 마치 카프카의 <변신>에서 어느 날 갑자기 벌레로 변한 그레고리를 가족들이 외면하듯이 마을 사람들도 공동체 내부 약자를 철저히 소외시킵니다. 처음에는 ‘왜 저러지’라는 생각을 하다 그들을 마냥 비난하게 되지 않고 머리를 끄덕이게 됩니다. 작가가 약 400페이지에 걸쳐 마을의 절망적 현실을 생동감 있게 묘사하는 까닭에 이런 상황이라면 어쩔 수 없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게 되었습니다.


작품의 제목에 들어가기도 한 탱고의 스텝, 즉 앞으로 여섯 스텝 그리고 뒤로 여섯 스텝의 형식에 맞춰 1부는 1장에서 시작해 6장으로, 2부는 역순으로 6장에서부터 시작해 1장으로  끝맺으며 하나의 원을 이루는 순환 구조의 독특한 구성을 취합니다. 그리고 각 장에서 등장인물의 시점을 변화하는 실험을 통해 작가는 고통의 악순환을 경이롭게 보여줍니다. 재밌던 것은 대부분의 세세한 디테일은 설명이 생략되어 있거나 아예 언급조차 없으며 카프카와 베케트에게서 큰 영향을 받았다고 느껴지는 부분들이 자주 보입니다. 이런 서사 구조가 작중 어두운 분위기와 맞물려 쇠퇴하는 80년대 헝가리 농촌의 모습을 잘 드러냅니다.


P : 어느 시월의 아침 끝없이 내릴 가을비의 첫 방울이 마을 서쪽의 갈라지고 소금기 먹은 땅으로 떨어질 즈음(이제 첫서리가 내릴 때까지는 온통 악취 나는 진흙 바다가 펼쳐져 들길로 다니기도, 도시로 가기도 어려울 터이다), 후터키는 종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P : 그래서 난 우리가 영원히 빠져나올 수 없다고 한 거야. 왜냐하면 모든 게 너무 완벽하고 그럴듯하거든. 가장 좋은 방법은 아무것도 시도하지 않는 거고, 그다음엔 눈을 믿지 않는 거지. 페트리너, 그건 우리가 언제나 빠지고 마는 덫이야. 우리는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믿지. 하지만 우리가 하는 일이란 게 결국은 자물쇠를 바꿔 다는 일일 뿐이거든. 그렇게 덫은 완벽하다네


책을 읽고 나서 수많은 갈등과 전쟁의 계기가 되었던 사상이 그 거룩하게 여겨졌던(?) 명분이 무너져 내리면서 헤매는 헝가리의 10월 찬비 같은 그런 몰락을 작가는 그리고 싶었는지 궁금했습니다. 그저 끝까지 늙고 망상에 사로잡힌 의사의  끝맺음 없는 글일 뿐인 것일지 글 자체가 모호해서 많이 헤매기도 했습니다. 동유럽 공산권이 해체되기 전인 1985년 발표된 이 책은 번역가님의 말을 빌리면  작가가 궁극적으로 그리고자 한 바는 정치적 저항이자 희망하는 인간이라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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