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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무 Oct 26. 2023

키키 키린의 말

by 고레에다 히로카즈

영화나 드라마, 혹은 책에서도 주인공보다 매력적인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반지의 제왕>에서는 프로도보다 샘이나 레골라스가 눈에 더 들어왔고 <타짜>에서는 아귀가 제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아마도 키키 키린이라는 배우도 일반적인 느낌으로 볼 때 그는 대배우는 아니지만 앞서 말한 배역들을 소화한 매력적인 배우 중 하나입니다. 제가 일본 영화를 많이 알지는 못하지만 그녀가 출연한 몇몇 작품들을 보고 있으면 그리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아서 대배우라는 수식어보다는(물론 대배우지만) 없어서는 안 되는, 관객을 매혹시키는 독특한 매력이 있는 배우로 제 머릿속에 있습니다.


이 책은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키키 키린과 12년간 나눈 대화입니다. 물론 전부를 다 실을 수는 없었지만 키키 키린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엿볼 수 있게 해주는 인터뷰집입니다. 2008년 <걸어도 걸어도>를 시작으로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인 <어느 가족>까지 6편의 영화를 함께 만들었던 감독과 키키가 나눴던 대화를 책으로 엮은 것입니다. 잡지 “스위치”에 먼저 연재했던 내용이 주를 이루지만 당시 사정상 넣지 못했던 대화를 추가했고 감독의 스케줄 수첩과 촬영 일지를 들춰보며 떠올린 기억과 고찰을 덧붙여 완성된 책입니다. 우선 고레에다 갑독이 본 그는 스스로를 배우로 생각하기보다 연예인으로 생각을 한다고 합니다. 자신의 위치가 연예인 어디쯤, 어떤 느낌으로 있을지 생각하며 그저 관객의 기대를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가져가려고 했다고 말합니다.



P : 세상은 이제 이런 데 질렸군.

보기 싫어지고 있네.

이런 걸 원하고 있어.



다른 배우들이 배역 연구에 몰두해 있을 때 그는 여기에 더해 이런 생각들을 보여주려고 연기에 임합니다. 나무를 관찰하면서도 동시에 숲과 땅과 하늘을 보는 눈을 가진 그만의 특별한 연기에 매력이 있었던 건 이런 이유에서였을 겁니다.


저는 이상하게 이 인터뷰집이 하나의 편지로 보이기도 했습니다. 고레에다와 키키에겐 통하는 것이 있었던 거 같은데 두 사람이 함께 작업한 작품들은 일상을 주제였기 때문인가 같습니다. 별것 없는 서사와 평범한 연기로 일상에 특별함을 부여하는 그는 특별한 사건이 없으면 드라마가 아니다, 영화가 아니다, 하는 착각이 드는 건 무서운 일이라고 강조하며 말하는 부분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는 고레에다의 작품에서 가족을 챙기는 따뜻한 어머니 역할을 주로 맡았습니다. 사실 키키는 젊었을 때부터 가식 없고 거침없는 언행으로 유명했고 함께 작업한 프로듀서와 배우의 불륜을 폭로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키키의 성격은 고레에다와의 인터뷰 중에도 묻어나는데 여배우를 고르는 기준에 ‘여자로서’라는 것은 있는지 혹은 여배우에게 반하는 경우가 있는지 물으며 난처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2018년 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 나눴던 마지막 인터뷰였습니다. 자신이 중병으로 시한부 선고를 받았다는 사실을 대수롭지 않은 말투로 전하며 더 이상 고레에다와 만나지 않을 거라고 선언합니다.



P : 이제 할머니는 잊고 당신은 당신의 시간을 젊은 사람을 위해 써.



단호하고 냉정하게 마지막 인사를 전합니다. 그 후 둘은 실제로 단 한 번도 만나지 못합니다. 그가 세상을 떠난 9월 15일은 고레에다 어머니의 기일이기도 한데 고레에다는 전상서 같은 연애편지의 마지막을 작별인사로 마무리합니다.



P : 어머니를 잃고 당신과 만났다는 억지는 옳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어머니를 잃은 것을 어떻게든 작품으로 만들려고 했기 때문에 (제 작품에서 어머니 역할을 맡은) 키린 씨를 만날 수 있었던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저를 만나줘서 고맙습니다.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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