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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무 Oct 01. 2023

등대로

by 버지니아 울프

역사에서 영웅들의 이야기들보다는 어떻게 보면 하찮게 취급당하던 일반인들의 잡초 같은 이야기들이 저는 더 좋았습니다. 보다 큰 스케일의 스토리들, 예를 들어 국가가 은폐해 온 비밀, 고위층 인사가 저지른 비리들, 멋지게 포장된 영웅들의 서사나 외면당하면서도 곧잘 이용당하는 정의 등 여전히 사람들에게 매력을 자극적인 것보다 뒤로 밀려나 빛깔을 잃어버린 우리들의 이야기들이 와닿았습니다. 이야깃거리가 되지 않을 거 같은, 그래서 쓸모없이 느껴지는 작은 이야기들은 기록에서 멀어져 왔습니다. 큰 이야기는 우상이 되어 독보적인 자리를 차지하고 작은 이야기는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경우들이 많은데 문학은 그런 작은 이야기들의 귀를 기울여주고 우리들에게 빛을 비춰줍니다. 이 책의 제목인 등대처럼 그 빛의 작은 이야기들이 저는 더 소중하게 느껴집니다.


이 책은 버지니아 울프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소설화한 것입니다. 램지 가족과 그의 손님들이 작은 섬에서 휴가를 보내며 겪는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겪은 이야기라고는 하지만 사실 이렇다 할 줄거리가 없습니다. 섬이라는 밀폐된 공간이 흔히 주는 스펙터클이나 긴장감이 없고 아무런 사건도, 작은 긴장감조차 찾아볼 수 없고 등장하는 인물들의 의식의 흐름만이 있습니다. 책은 총 3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부는 등대로 소풍을 가려는 램지 가족의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합리적이고 냉철한 아빠 램지는 그 시대를 대표하는 합리주의자이며 명망 높은 철학자이면서도, 자신의 업적이 영원하지 않을까 불안해하며 끊임없이 아내를 비롯한 여성에게 공감을 요구하는 유아적인 인물입니다. 이 책의 실질적인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램지 부인은 모든 빈 곳을 채우는 존재입니다. 그녀는 남편 램지의 정확하면서도 날카로운 말에 상처받은 아들 제임스를 어루만지면서도 언제나 공감을 바라는 남편을 한결 같이 채워줍니다. 램지 부인으로서의 완벽한 역할 때문에 모두에게 찬사를 받으면서도, 언제나 타인의 파편으로만 존재하는 그녀는 이름이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오직 램지 부인으로만 존재할 뿐 그녀는 누구보다도 또렷하게 존재하지만, 그녀 자신으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녀는 안정과 평화를 만들어 내는 자기 존재에 허영을 느끼면서도 자신의 부재에는 끝 모를 허무를 느끼는데 이 책은 그 간극을 그려냅니다.


2부 역시 독특했는데 10년의 시간을 묘사한 폐허에 관한 산문시였습니다. 그 사이 1차 세계대전이 있었고 모든 것이 파괴되었습니다. 램지 부인이 이룩한 평화로 충만했던 집은 텅 비었고 폐허가 돼버립니다. 무엇보다 당황하게 하는 것은 램지 부인의 갑작스러운 죽음이었습니다. 버지니아 울프는 램지 부인이 왜 죽었는지, 어쩌다가 죽었는지 이유를 밝히지 않습니다. 그녀는 쏟아냈고 소멸한 것이 하고 충분히 이야기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램지 부인뿐 아니라 아들 앤드류는 전쟁터에서 죽었고, 가장 예뻤던 딸 프루는 출산 중에 사망합니다. 이 모든 죽음은 괄호로 처리되고 작가는 그저 반복해서 말을 합니다.


3부는 10년 후 다시 섬을 찾은 램지 가족과 손님들을 다시 비춥니다. 늙은 램지는 죽은 아내를 기리기 위해 아들 제임스와 딸 캠을 억지로 데리고 등대로 향합니다. 완벽한 엄마를 잃은 남매는 침묵으로 아버지 램지에게 저항하고 과거의 램지 부인처럼 아버지의 결핍을 채워주지 않겠다는 서로 약속을 합니다. 섬에서는 한 시선이 램지 가족이 탄 배를 좇습니다. 그 시선은 릴리의 것으로, 그녀는 램지 부인을 존경하면서도 그녀의 허위를 꿰뚫어 본 인물입니다. 릴리는 모든 상황을 꿰뚫는 관찰자이며 어쩌면 버지니아 울프 자신이었을 겁니다. 릴리는 한 여성으로서 램지 부인의 역할을 대신해 줄 것을 요구받지만, 그것을 거부하고 섬에 남아 멀어져 가는 그들을 지켜만 봅니다.


버지니아 울프는 다른 길을 택합니다. 재미있고 그럴싸한 줄거리가 있으며 선이 굵은 이야기가 아니라 그림을 그리듯 글을 써 내려갑니다. 순간을 기록한 그림 안에 모든 것이 다 들어 있듯이 멋지게 글을 쓰며 우리에게 묻습니다. 사건은 반드시 있어야 하며, 글은 논리적이어야만 하는지, 인물 간 대화는 선명하게 구분해야 하며 의식과 대화는 반드시 나뉘어야 하는지, 그것만이 진실을 드러내는 단 하나의 길인지 생각해 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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