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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무 Nov 04. 2023

향수

by 밀란 쿤데라

브르노행 기차표를 예매한 건 순전히 쿤데라 때문이었습니다. 그때는 지금이 아니면 볼 수 없다는 생각에 프라하에서 계획에 없던 행동을 하였습니다. 그의 책들이 전집으로 만들어지면서 한 권씩 그를 만나 갈망하던 때였습니다. 그의 책을 한 장만 넘기면 작가의 이력을 딱 두 문장으로 설명하면서부터 설레었습니다. “체코슬로바키아에서 태어났다. 1975년 프랑스에 정착하였다.” 그에 따르면 한 인간의 생이란 “어디에서 태어났고, 어디 어디에서 얼마간 살다가, 어디에서 죽었다.” 단 세 문장이면 된다고 이야기한 게 기억이 났습니다.


“체코슬로바키아에서 태어났다”는 문장 속의 국가는 지금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쿤데라가 태어나고 파리로 망명을 떠날 때까지의 국가였고, 1993년에 체코와 슬로바키아가 분리된 상태가 되었습니다. 체코 국토의 대부분은 과거의 보헤미아 지방이고 프라하가 그 중심 도시였습니다. 브르노는 모라비아 지방의 중심 도시였고 쿤데라는 브르노에서 태어나 그곳 야나체크 음대에서 작곡을 공부한 뒤 보헤미아 수도 프라하에서 영화감독 수업을 받았습니다. 망명 이후 이 책에 이르기까지 줄곧 체코를 보헤미아라고 칭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쿤데라는 “프라하의 봄”으로 통칭되는 1968년 개혁의 물결 중심에 섰고, 소련의 침공으로 시작된 암흑기에 공직에서 해직되고 작품이 몰수되는 지경에 처하자 공산 체제의 조국을 떠나 1975년 파리로 망명한 것입니다.


P : “아직도 여기에서 뭐 하고 있는 거니!” 그녀의 목소리는 사납지 않았지만 부드럽지도 않았다. 실비는 화를 내고 있었다. “그러면 내가 어디에 있어야 하는 거니?” 이레나가 대답했다. “네 나라에!” … “나는 이십 년 전부터 여기에 살고 있어. 내 삶은 여기에 있다고.” “너희 나라에서는 혁명이 일어나고 있어.” … “너의 위대한 귀환이 될 거야.”


여기는 프랑스 파리이고, 실비가 말하는 네 나라는 이레나의 나라는 체코입니다. 이레나는 체코에서 파리로 망명해 20년째 살고 있었고 이레나가 왜 망명했는가에 대한 질문이 뒤따를 수밖에 없는데, 이 질문과 동시에 질문을 풀어가는 방식, 즉 귀환의 여정이 망명 작가 쿤데라가 이레나를 앞세워 이 책을 쓸 수밖에 없었던 이유였습니다.


이레나는 실비가 일깨워준 위대한 귀향을 위해, 친구들과의 저녁 식사에 보르도산 고급 포도주를 준비합니다. 그러나 친구들은 한결같이 그들이 마셔온 체코 맥주만을 고집하고 이레나는 당혹감에 빠집니다. 게다가 이레나는 갑자기 닥친 이상 고온 날씨로 인해 파리에서 입고 온 가을 옷을 모두 벗어야 했고 과거에 머물러 있는 이곳의 칙칙한 옷을 입어야만 했습니다. 친구들은 이레나가 파리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한 마디도 묻지 않고 그들이 이곳에서 어떻게 살아왔는지에 대해 되풀이해서 말할 뿐, 애써 준비한 포도주를 거두고 이레나는 망칠 뻔한 친구들과의 만남을 가까스로 추스르고 프라하 산책을 나섭니다.


P 첫 문장 : 그리스어로 귀환은 ‘노스토스 (nostos)’이다. 그리스어로 ‘알고스(algos)’는 괴로움을 뜻한다. 노스토스와 알고스의 합성어인 ‘노스탈지’ 즉 향수란, 돌아가고자 하는 채워지지 않는 욕구에서 비롯된 괴로움이다.


브르노 역에 내려 플랫폼을 빠져나갈 때 여러 개의 트램 레일이 뻗어 있었고 노숙자들이 벤치에 누워있었습니다. 관광객도 별로 없었고 보이는 글자들은 해독할 수 없는 기호로 당황했던 기억이 납니다. 정류장에서 3시간짜리 자유 승차 티켓을 사서 트램에 올라 몇 정거장 지나자 오래된 건축물로 둘러싸인 광장이 나왔습니다. 광장을 빙 둘러 브르노 대학 건물들이 퍼져 있었고 파라솔이 이뻤던 술집에서 전통 맥주인 스타로브르노를 홀짝이며 이 책을 꺼냈습니다. 화려한 문장으로 저의 20대를 감염시킨 쿤데라가 태어나고 자란 곳에서 이곳이 아닌 파리에서 이 책을 써야 했던 한 인간에 대한 이해를 해보려고 책을 폈던 기억이 납니다. 저녁 7시가 넘었던 시간까지도 어둠이 깔리지 않는 도시에서 이 책을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P : 체코인들이 조국을 사랑했던 것은 작고 끊임없이 위험에 처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애국심은 조국에 대한 커다란 연민이다. 덴마크인들도 이와 유사하다. 조제프가 이 작은 나라를 망명지로 택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과거는 오늘날 그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는 더 이상 과거에 살고 있지 않았다. 인간은 현재의 순간만을 확신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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