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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무 Oct 14. 2023

지도와 영토

by 미셸 우엘벡

어렸을 때부터 지도 보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지도 안에 있는 여러 지명들이 저에게는 밤하늘의 반짝이는 별 같이 느껴지던 시절이었습니다. 어느 날 가족들이 떠나는 여행에서 어머니가 나긋하게 “여긴 어디 어디라고 해” 하며 지도에서 봤던 상상으로만 여기 지던 지명들이 마치 영화나 소설 속 가상의 도시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 신비로운 기분에 사로잡혔던 기억이 있어서 그런지 여행, 지도라는 말을 들으면 아직도 황홀한 느낌을 받습니다. 보물찾기 같던 그 지도가 현실이 되어버리는 순간이 너무 좋아서였는지 몰라도 지금도 어디 여행을 갈 때면 지도를 사는 취미가 생겨버렸습니다. 지금은 사실 핸드폰이 더 편한데도 말입니다.


처음 책장을 펼쳤을 때 놀랐던 것은 소설 내에 미셸 우엘벡이란 이름의 작가가 등장한다는 것입니다. 작가가 작가의 이름을 그대로, 아주 큰 비중을 차지하며 나옵니다. 그가 어떤 인물인지 시치미를 떼며 아주 직설적으로 묘사되는데 이전까지 제가 알고 있던 작가가 맞는지, 이렇게 재밌는 사람이었나 싶었습니다: 이 전 작품들을 보면 과격할 것만 같던 작가가 이 책을 통해 보면 실제 본인의 모습과 가깝지 않을까 감히 생각해 봤습니다. 뿐만 아니라 프랑스 유명인사들이 대거 등장하고 이름만 따온 전혀 다른 인물들도 등장합니다. 이런 실제와 허구를 넘나드는 소설의 분위기가 좀 더 작가의 주관을 강하게 느끼게 했습니다.


화가이자 사진가인 주인공이 미슐랭 지도를 사진으로 찍어 만든 예술작품에 사회 전반에 걸친 함의를 담은 것에서 따온듯하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소설 전체에 건축, TV, 사진, 미술 등과 같은 문화예술뿐만 아니라 아버지, 죽음, 사랑 등의 주제와 그것을 바라보는 비판적이면서 예리한 작가의 시선이 가득 담겨있습니다. 총 3부로 이루어져 있는 이 책은 1부에선 제드의 유년시절과 초반부 사진 작품 활동을, 2부에선 그가 부를 얻게 되는 직업 시리즈, 기업연합 시리즈라는 그림들과 작가 미셸 우엘벡과의 만남을 그리며 그의 삶과 작품을 따라가며 신변잡기 식으로 여러 주제에 대해 이야기를 합니다.


가령 제드의 아버지가 소설 표면으로 떠오르면 그가 종사하는 건축계에 대한 여러 지식들과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같은 무슨무슨 주의들이 건축에 어떤 영향을 끼쳤고 현재는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지에 대해 작가는 그것을 어떻게 여기는지에 대해 아주 흥미롭게 이야기(논평에 가까운)를 합니다. 문화예술에 대한 지식이 전무한 제가 읽기에는 살짝 머리 아픈 내용이었지만 개성 강하고 입담 있는 작가의 시선으로 그려져서인지 몰입감 있고 빠르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3부에 가서는 조금 생뚱맞게도 살인사건이 일어납니다. 정년퇴임이 가까운 형사의 시선으로 범죄와 죽음에 대해 말하기도 하고 예술가 제드가 죽음에 가까워서 전념하는 예술활동을 통해 끝까지 사회에 대한 예리한 비판과 풍자를 느낄 수 있습니다.


굉장히 두서없고 어떻게 보면 한 번에 얘기하기 어려운 거대한 주제들이지만 작가는 이 소설 하나로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모조리 담아냈습니다. 파리와 프랑스 시골 도시들의 전경들 뿐만 아니라 프랑스의 사람들과 프랑스의 이념들과 프랑스의 흐름들을 볼 수 있습니다. 열린 결말이라 완성보다는 미완에 가까운 느낌인 책입니다.



P : 사람의 목소리는 절대 변하지 않는다. 눈빛 또한 목소리 못지않게 변하지 않는 부분이다. 대개 노화가 무엇인지 한눈에 보여주는 육체의 쇠락에도 불구하고 목소리와 눈빛만은 끈질기게 건재해, 성격이나 꿈, 욕망 등 한 인간의 개성을 결정짓는 모든 것을 가혹하리만치 반박할 수 없게 증명한다.


P : 우리는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 타인을 통해 자신의 노화를 인식한다. 혼자서는 늘 영원이라는 틀 안에서 자신을 바라보려는 경향이 있다.



미셸 우엘벡은 우파 아나키스트라고 자처합니다. 그는 극단적 자유주의자로 봐도 무방한데 현란한 지적 배경을 바탕으로 온갖 지식과 썰을 풀어내는 그는 화자들을 자기 비하적인 태도를 취하며 무심한 듯 툴툴거립니다. 허무하고 냉소적인 특유의 분위기까지 더해지면서 비루한 척 하지만 그 바탕에는 비꼬임이 깔려있습니다. 현실로 본다면 썩 기분 좋은 방식은 아닌데도 그가 풀어내는 썰을 듣고 싶어 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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