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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무 Aug 29. 2023

안과 겉

by 알베르 카뮈

완성하지 못한 카뮈의 마지막 유작을 되풀이해서 읽고 있습니다. 읽는 내내 그의 첫 번째 작품이 머릿속에서 떠올라서 이 책을 책장에서 꺼내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운이 좋게도 프랑스에서 몇 년의 시간을 머물 기회가 있었을 때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습니다. 작가들을 좋아해 작가들의 뒤를 미술관 가듯이 쫓아가던 시절, 카뮈의 발자취를 무작정 따라간 적이 있습니다. 가난하지만 무엇인가 시작할 수 있을 거 같아 찾아간 그의 어린 시절 바닷가를 알게 되었고 차를 빌려서 찾아가 보았습니다. 자르댕 데세 공원을 지나 양의 길이라고 불리는 도로를 지나면 카뮈의 시작점인 카뮈의 바다가 나오는데 그것에서 며칠 머물며 이 책을 봤던 기억이 납니다.


카뮈가 1937년 발표한 수필집입니다. 5년이라는 시간이 지나 <이방인>을 완성하는데 카뮈는 스스로도 이 책의 글들이 서투른 면이 유별나게 마음에 걸려 오랜 시간 책의 2쇄 3쇄를 결정하지 못하고 재판을 미뤘던 책입니다. 다른 작품들에 비해 덜 성숙한 느낌이 있기는 하지만 저는 그의 꾸밈없는 날 것의 매력을 좋아하기에 이 책 또한 머릿속에 오랫동안 각인이 돼있는 책이었습니다.


이 책의 표제는 책의 내용과도 일맥상통한 거 같습니다. <아이러니>, <긍정과 부정의 사이>, <영혼 속의 죽음>, <삶에의 사랑> 그리고 마지막으로 <안과 겉>, 이렇게 5가지 이야기를 통해 절망과 사랑이라는 삶의 양면성이 결코 양립할 수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또한 삶의 양면성은 작품 속에서 여러 가지 상징으로 나타납니다. 예를 들어, 카뮈는 청각 장애를 갖고 있던 어머니가 성폭행을 당해 뇌진탕으로 쓰러졌던 때를 상기하며 “질병과, 자기가 그 속에 잠겨있다고 느껴지는 죽음만이 존재하고 있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죽음 같던 고통은 연민과 어머니에 대한 유대감, 그리고 사랑이 되어 돌아옵니다. 카뮈는 삶에 대한 절망과 환멸이 희망으로 바뀌는 과정을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슬픔을 느끼며, 그로 인하여 더 많은 사랑을 느낀다. 그렇다, 그것이 아마 행복인지도 모른다. 즉, 우리의 불행을 측은히 여기는 감정 말이다.”


양면성은 상징적인 두 도시로 비유되기도 합니다. 체코 프라하에 갔을 당시 호텔 옆방 남자가 타살돼 시체로 발견됐던 기억을 되살린 후 이탈리아 비첸체에서 본 찬란하게 아름다운 자연을 묘사합니다. 그의 기억 속에서 극단에 있던 두 도시는 결국 하나로 합쳐지는데 결국 삶과 죽음, 긍정과 부정, 이 모든 삶의 안과 겉은 맞닿아 있다고 말하는 듯합니다. 그리고 이런 의식의 연장선상에서 “삶에 대한 절망 없이는 삶에 대한 사랑도 없다.” 는 말을 남기기도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절망과 사랑의 위치가 바뀐 이 말이 더 맘에 듭니다. 절망감에 가슴이 내려앉을 때마다 내가 내 삶을 너무 사랑하다 보니 이런 절망도 겪는 거라고 스스로의 위안이 저에게는 생기게 되었습니다.


이 책은 그가 궁극적으로 쓰고 싶었던 이상적인 작품의 예고편이기도 하다는 점입니다. 서문을 읽어보면 “내 실제 됨됨이와 내가 하는 말 사이에 균형이 이루어지게 되는 날, 그날에는 아마도 내가 꿈꾸고 있는 작품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내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그 작품이 어느 모로 보든지 안과 겉과 흡사하리라는 것, 또 그 작품의 주제가 어떤 형태의 사랑이리라는 것이다.”라는 말을 합니다. 카뮈가 자신의 됨됨이와 말 사이의 균형을 찾았고 결국 꿈꿨던 작품을 썼는지 지금 알 수 없지만 작가가 세상을 떠나기 전 품었던 이상과 닮았다는 것만으로도 이 책의 가치는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P : 내가 시간이라는 옷감에서 이 한순간을 오려내는 것을 허락해 주기 바란다. 다른 사람들은 책갈피 속에 한 송이 꽃을 접어 넣어 사랑이 그들을 스쳐 지나가던 어느 산책의 기억을 그 속에 간직한다.



2009년 프랑스 대통령이던 니콜라 사르코지가 카뮈의 아들인 장 카뮈를 찾아가 “당신 아버지의 유해를 국립묘지인 팡테옹에 이장하자.”라고 제안합니다. 그는 가문의 영광이 될 수도 있는 제안을 단칼에 거절합니다. 팡테옹으로의 이장이 아버지의 삶을 왜곡하는 일이 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당시 프랑스 일간지 르몽드는 장이 왜 아버지의 팡테옹 이장을 거부했는지 구체적인 이유를 밝히지는 않았지만 카뮈의 작품 세계를 들여다보면 그가 거대한 돔을 얹은 신전이 그와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듭니다. 카뮈의 메시지는 정의와 저항, 그리고 부조리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었지만 이 책에서 나타나는 인간의 소소한 삶에 대한 카뮈의 애정을 아들이 느꼈기 때문이지 않을까 감히 추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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