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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무 Aug 27. 2023

대머리 여가수

by 이오네스코

우디 알렌의 영화 중 기억에 남는 작품을 고르라면 저는 일체의 망설임도 없이 <미드나잇 인 파리>를 선택할 것입니다. 실제로 일어날 수 없는 그 시절로 돌아가서 제가 좋아하는 작가를 만난다는 상상을 실현을 시캬주었기 때문인데 실제로 1920년대 파리에는 많은 소설가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제임스 조이스부터 시작하여 피츠제럴드와 헤밍웨이까지 지금도 우리들에게 익숙하면서도 사랑받는 멋진 작가들이 한 장소에서 서로의 글을 공유하며 멋진 작품들을 만들어 내었습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제 글을 하나 들고 그들과 이야기를 하는 상상을 해보게 되었던 기억이 납니다.


저는 프랑스 역사상 또 한 번의 문화가 부흥기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건 1950년대입니다. 아마 전 세계 문학사에서도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특이한 시기였던 이때는 수많은 천재 작가가 나타나 기존의 문학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작품들을 동시 다발적으로 발표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소설에서는 반소설이라고 하는 누보로망이, 희곡에서는 반연극이라고 하는 부조리극이 나타난 것이 바로 이 시기였습니다. 1950년대에 나온 프랑스 문화가 이룩한 성과는 다양성 면만으로  따져봐도 너무나 풍성하던 시기였습니다.


이 책은 그 시기에 나온 최초의 부조리극이라고 많은 문학 연구자들이 논하는데 희극계의 대가 이오네스코가 이 시기에 나타난 대표적 천재 중 한 사람입니다. 연극으로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지만 대본집으로 만난 그의 희곡들은 읽는 것만으로도 재밌습니다. 이 표제작을 비롯해 <수업>이나 <의자> 같은 희곡들을 읽다 보면 무대 위의 장면들이 머릿속으로 그려져서 눈에 보이는 착각을 불러일으키기도 하고, 약간은 황당하면서도 기발한 이야기에 금방 매료되기까지 합니다. 당시 쌍두마차라 불리던 사뮈엘 베케트의 작품들이 희곡만 읽어서는 재미를 느낄 수 없는 것과 대조를 이룬다고 많은 평론가들이 이야기를 합니다.


이 책은 주인공인 스미스 부부가 저녁 식사를 마친 뒤 나누는 일상적인 대화에서부터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앞뒤가 안 맞는 말장난 같은 대화에 처음에는 번역이 잘못된 줄 알고 출판사에 전화까지 고려할 정도로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지극히 일상적인 것처럼 보이던 그들의 대화는 점차 황당무계하게 변해 가기 시작하는데 가령 환자의 간을 수술하기에 앞서 멀쩡한 자신의 간을 먼저 수술해 본 의사의 이야기라든지, 2년 전에 죽고 3년 전에 신문에 부고가 나서 1년 반 전에 장례식에 갔던 “대영제국에서도 가장 멋진 시체”였던 잡슨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 등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이야기들로 채워집니다. 그들이 이런 대화를 나누고 있는 동안 시계는 거꾸로 돌아가고 그때 마틴 부부가 저녁 식사를 함께하기 위해 방문하는데 마틴 부부는 자신들이 부부 사이라는 사실마저도 잊어버린 채 서로를 알아보지 못합니다. 여기에 하녀와 소방대장이 등장해 이야기를 더욱 극적으로 만들기까지 하는데 처음에 그저 황당한 코미디처럼 보이던 이 희곡은 점차 인간의 근본적 비극을 나타내기 시작합니다.


인간의 삶이 얼마나 공허하고 우스꽝스러운지 여실히 드러내는데 이런 것을 두고 당시에는 희비극이라는 새로운 장르처럼 이야기를 했습니다. 돌이켜 보면 이오네스코 이전의 연극은 구체적인 어떤 문제를 다루었다고 합니다. 헨리크 입센은 <인형의 집>에서 여성의 인권 문제를 이야기했고 안톤 체호프는 <벚꽃 동산>에서 몰락해 가는 귀족을 통해 인간의 페이소스를 다뤘습니다. 하지만 이오네스코와 베케트에 이르면 이런 개별적인 문제가 아닌 보다 근본적인 문제를 총체적으로 보여 줍니다. 이오네스코 자신은 “내 눈에 우스꽝스러운 것은 특정한 사회 체제가 아니다. 그것은 인류 전체다”라고 말한 인터뷰를 보면 바로 이런 통찰력이 50년대 작가들의 천재성이라 할 수 있을 거 같습니다.


P : “그런데 대머리 여가수는?"

(답답한 침묵)

늘 같은 헤어스타일이죠."


이 연극의 원래 제목은 <금발 여선생(Institutrice blonde)>이었습니다. 그러나 리허설에서 저 대사를 말해야 하는 소방대장 역을 맡은 배우가 리허설 중 대사를 까먹고 그만 <대머리 여가수>라고 말하는 실수를 범하고 말았는데 리허설을 보던 이오네스코가 "그게 제목이야!"라고 외치며 제목을 바로 바꾸어버렸습니다. 이오네스코가 즉석으로 제목을 바꿔버릴 수 있었던 이유는 이 연극에서는 금발 여선생도 대머리 여가수도 안 나오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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