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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무 Apr 07. 2022

이 경계를 지나면 당신의 승차권은 유효하지 않다

by 에밀 아자르

가끔 벽에 붙은 광고나 문구들이 눈에 들어올 때가 있습니다. 인상적이었던 문장들이 여러 가지가 있었는데 그래도 기억에 남았던 것은 뉴욕 지하철에서 본 “열차에서 서핑을 하면 만신창이 되어 사망할 수 있습니다.”라는 한국어로 된 표시였습니다. 저 같은 일반인들은 그저 웃고 지나가지만 이런 세세한 문장들까지 작가들은 눈여겨보기도 합니다.     


이 책은 그의 또 다른 이름이었던 에밀 아자르라는 이름으로 발표하였습니다. <그로칼랭> 이후로 만든 작품이며 지하철 경고문에서 제목을 따온 것입니다. 예순을 앞둔 남자의 무력한 육체와 경기 침체를 맞은 서유럽의 상황이 절묘하게 일치하는데서 특징을 찾을 수 있는데, 이는 비단 한 인간의 노쇠가 아닌 한 사회, 더 나아가 한 문명의 끝을 이야기합니다. 경계를 지나면 승차권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고 하지만 그 경계조차 넘어서게 만드는 존재가 있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이 책에는 자크 레니에라는 로맹 가리를 쏙 빼닮은 노년의 신사가 나옵니다. 젊은 시절 독일 군에 맞서 레지스탕스로 활약하며 훈장을 받았던 그는 대형 출판사를 운영하는 성공한 남자로 인정받으며 살아가고 성공한 늙은 남자답게 25살의 로라와 사랑을 하며 살아갑니다. 주인공은 예순 살의 남자이고, 그는 더 이상 성적으로 민감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그는 레지스탕스 출신다운 노력으로 잘 버티며 살아가고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노쇠해 가는 육체와 나름 영웅적으로 싸워오고 있습니다. 어느 날 아침 동갑내기인 미국의 백만장자가 그에게 나이를 먹어 성기가 작아지고 발기조차 제대로 되지 않는다는 고민을 털어놓으며 주인공의 생각이 바뀝니다. (너무 노골적이지만 텍스트 그대로 따왔습니다.) 이 말은 일종의 암시가 되어 레니에를 괴롭힙니다. 그는 자신의 남성적 능력을 의심하고 불안해하기 시작하고 의심과 불안은 그의 남성을 더욱 위축시킵니다. 때마침 사업상의 위기가 찾아오고 다국적 기업의 공세를 이겨낼 수 없는 레니에는 자신이 평생 이룩한 세계를 헐값에 처분해야 하는 상황에까지 몰립니다. 모든 걸 포기하고 로라와 함께 한적한 시골로 내려가 여생을 보내야 할 시점이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부서질 수는 있어도 패배할 수는 없다던 헤밍웨이의 말처럼 그 또한 패배를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대신 의학과 성적 환상을 통해 기적적인 부활을 꿈꾸지만 무용한 노력일 뿐 결국 그는 자살을 생각합니다.     


그는 옛 동지의 도움을 빌려 타살로 위장한 자살을 계획합니다. 시간의 힘에 떠밀려 경계를 넘어버린 그는 자신이 더는 유효하지 않은 승차권을 가지고 살아갈 수 없다고 판단합니다. 그건 비단 발기부전만을 의미하는 건 아니었습니다. 경계 바깥에도 세상은 있을 것이고 그곳에서 승차권은 더는 유효하지 않겠지만 사실은 어떤 승차권도 필요 없다고 생각합니다.          



P : 갑자기 밤이 달라 보인다. 마치 다른 종류의 밤이 있었던 것처럼, 너무 늙어버린 육체 안에 자리 잡은 너무나도 젊은 마음들을 진정시키는 밤이 온다.     


P : 참 더러운 일이에요. 늙어가는데 여전히 마음이 젊다는 것이요...



이 책은 1981년 캐나다 필름에서 제작하여 영화로도 나왔습니다. 우리에게는 해리포터 1,2편의 교장선생님으로 알려진 리처드 해리스 주연의 영화였습니다. 그의 회고록에 의하면 자신의 작품 중 가장 실망스러운 작품이었으며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경험이었다고 합니다. 처음 감독이 내놓은 2시간 반짜리 조금은 거친 느낌이 들었지만 로맹 가리의 작품이 느껴지는 폭발성 있는 작품이라고 좋아했지만 제작사에서 마음대로 편집한 1시간짜리(아마 저희들이 마음먹고 찾아보면 볼 수 있는 현재 상태) 관객에게 내놓은 작품은 재앙이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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