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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무 Jul 19. 2023

머나먼 섬들의 지도

by 유디트 샬란스키

책을 좋아하는 조카와 가끔은 서점을 들립니다. 그 아이의 책을 고르는 기준은 디자인이 가장 중요했고 그렇게 돌아다니다 힘겹게 고른 책이 이 책이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와서 읽어주려고 했는데 너무 어렵다며 울고불고 난리를 쳤지만 마음을 다잡고 결국 저에게 오히려 선물로 주었습니다. 그림책 섹션에 있던 책이 다섯 살 아이에게는 어려웠지만 저는 아름다운 책을 소장하게 되어 조카의 응석이 이날만큼은 좋았습니다. 책은 그림책들이랑 헷갈릴 정도로 아이들 그림책과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이들이 좋아하는 원색 계열이 아닌 청회색 바탕 위에 회색, 검은색, 흰색으로만 구성되어 있고 중간에 그러진 지도는 밝은 오렌지색으로 그려진 지도가 저를 반기고 있습니다.


이 책은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지도책입니다. 엔솜헤덴, 어센션, 트린다데, 사우스킬링, 나푸카, 타온기 등등 귀빠지고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던 오대양에 흩어져 있는 외딴섬들의 이름입니다. 책을 읽으면서 과연 저자는 이곳들을 직접 방문하고 책을 썼을까 의문이 생기기도 하였지만 찾아보니 그렇지는 않았다고 밝혔습니다. 사실 답은 책의 부제에 나와 있는데 ‘내가 한 번도 가보지 않았고 앞으로도 가지 않을 50개의 섬’이라고 미리 밝혀두고 있었습니다.


1980년 동독에서 태어난 그는 글을 쓰는 작가이자 북 디자이너입니다. 국경을 자유롭게 넘을 수 없는 섬과 같은 나라에 살면서 지도로 여행하는 법을 익혔다고 합니다. 서문에서 ‘나는 지도 위를 이리저리 더듬는 손가락의 움직임이 에로틱한 몸짓으로 보인다는 사실을 깊이 자각한 적이 있다’고 썼습니다. 이에 대해 가디언지는 지도 애호가들은 그녀가 무엇을 말하는지를 바로 알아챌 것이라며 어떤 풍경을 멀리 떨어져서 동경하는 일이 실제로 그곳에 도달했을 때 얻는 만족보다 훨씬 크기 때문이라고 평했습니다.


이 책을 소개할 때 빠지지 않는 문구는 시각적으로 아름답다는 것입니다. 2009년 <가장 아름다운 독일 책>에 뽑혔고, 이듬해 세계적인 디자인상인 레드닷 디자인 어워드를 받았습니다. 모든 오른쪽 페이지에는 겉표지와 같이 청회색 바탕의 바다 위에 흰색, 회색, 오렌지색으로 나타낸 섬의 평면이 그려져 있고 크기도 모양 제각각인 미지의 섬들을 직접 작가가 그렸습니다. 디자인은 나중에 찾아보고 알게 된 것이며 실제로 책을 읽으면 실린 글도 무척이나 좋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저자는 질병, 강간, 영아 살해, 식인주의, 핵실험, 환경 파괴 등 섬에서 벌어졌던 끔찍한 이야기들을 유려한 산문으로 적어 놓았습니다. 각 섬의 지도와 함께 들려주는 이야기와 역사가 마치 외할머니의 이야기들처럼 흥미롭습니다.



P : 지도는 구체적이면서도 추상적이다. 그리고 아무리 정확하고 객관적으로 그리려 했다 해도 결국 실제를 있는 그대로 표현한 것은 아니다. 지도는 하나의 과감한 해석일 뿐이다. 


P : 북극해의 카라 해 한가운데에 '외로움' 있다. 이 섬의 특징은 그 이름인 엔솜헤덴(외로움을 뜻하는 노르웨이어'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중략) 노르웨이 북부의 항구도시 트롬쇠에서 온 한 선장이 이 섬에 붙인 원래 이름은 잊히고, '외로움'은 러시아어로 '은둔의 섬'으로 불리게 된다. 오늘날 이 섬에 들어오는 사람들은 과거와 같이 죄수들이 아닌, 세상을 등진 은자들이다. 그들은 이곳 얼음사막에서 묵상을 하다가 성자가 되어 뭍으로 돌아간다.



국내에도 번역된 작가의 또 다른 책, <기린은 왜 목이 길까?>로 2012년 다시 한번 가장 아름다운 독일 책에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지도책(atlas)의 본래 이름은 <테아트룸 오르비스 테라룸>으로 세계의 극장이라는 뜻입니다. 동독에서 자라난 저자가 지도와 책으로 세계를 여행하게 된 이야기를 곱씹으며 어쩌면 지금 이 순간 분단된 우리나라에서도 비슷한 이야기가 만들어지고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약은 때로는 무한한 상상력과 창작의 원천이 된다는 사실을 이 책을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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